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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 아킬레우스는 왜 노여움이 달콤하다 했나?(한겨레신문-2011902)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7.15 14:02 조회 1,262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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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는 왜 노여움이 달콤하다 했나?

 
등록 : 2011.09.02 20:37 수정 : 2011.09.02 20:37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고전 오디세이 39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사원’(私怨)은 ‘공분’(公憤)으로 수준을 달리할 수 있다. 사적 보복이 아닌 공적인 응징 차원에서 사회적 모순을 척결하는 역사적 변혁을 꿈꿀 때, 분노는 꿀보다 더 달콤한 꿈으로 피어날 것이다.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는 희망이 될 것이다.
“부디 불화는 신들에게서도, 인간들에게서도 사라져 없어지기를!/ 그리고 노여움도! 그것은 사려 깊은 사람조차도 거칠게 만들고,/ 그것은 또 똑똑 떨어져 내리는 꿀보다도 훨씬 더 달콤하기에/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커져갑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처럼.”(<일리아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전사 소식을 듣고 가슴을 찢으며 했던 회환의 말이다. 파트로클로스는 그에게 목숨보다도 소중한 친구였다.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연합사령관인 아가멤논이 자신을 모욕하자 불화와 노여움에 빠졌고, 그로 인해 전투에서 빠지겠다고 선언했으며, 아가멤논과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아 군에게 패배를 당하여 뼈아픈 고통을 당하라고 저주도 하였던 터다. 그가 빠지자 전투의 판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그리스인들은 죽어갔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가 앙심을 품고 고집을 부린 결과는 황당하고 참담했다.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자책감에 시달렸고 통탄했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아킬레우스. 개빈 해밀턴의 1763년 작.
 
그런데 이상하다. 노여움이 왜 달콤하다고 했을까? 분노에 휩싸이면 고통스럽고 불쾌하지 않은가? 이에 대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노여움은 나나 내 사람이 누군가에게 명백하게 무시를 당했을 때, 그것도 적절한 이유도 없이 무례한 폭력처럼 당했을 때 생긴다. 하지만 그의 규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노여움이 끓어오르기 위해서는 부당하게 당한 만큼 꼭 갚아주겠다는 앙갚음의 욕망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 보복의 욕구가 없다면, 노여움도 없다는 말. 복수심은 마음의 평온함을 깨뜨리며 고통을 일으키기에, 노여움은 고통을 수반하는 욕구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어째서 노여움이 “똑똑 떨어져 내리는 꿀보다도 훨씬 더 달콤하다”는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을 잇는다. “모든 역정(逆情)은 보복을 하고 말리라는 희망에서 생겨나는데, 거기엔 모종의 기쁨이 따라온다.” 욕망은 결핍을 뜻하며, 결핍은 고통을 일으킨다. 하지만 결핍과 욕망이 채워진다면, 고통은 사라지고 환희가 찾아온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결핍이 채워지지 않더라도, 언젠가 그 욕망이 충족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순간에도 충분히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열망하는 것들을 이루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달콤한 일이다. 어떤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열망하지 않는 법인데, 역정을 내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능한 일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무시를 당하여 고통을 받는 사람이 모두 노여워하는 것은 아니다. 노여움은 보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상대에 대한 응징을 상상할 때 비로소 생기며, 앙갚음에 대한 열망이 강렬해지고 확신이 설 때, 고통을 넘어 달콤해진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 고통스러웠지만, 반드시 갚아 주고 말리라는 다짐과 희망을 통해 쾌감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었다.
만약 부적절하게 무시를 당하고도 도저히 앙갚음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좌절과 한탄과 억울함, 자괴감은 있을지언정, 진정한 분노는 없다. 불가능한 복수를 잠시 꿈꿀 수는 있겠지만, 불가능을 인식하는 순간 잠깐의 위안은 끝나고, 노여움은 곧 절망과 좌절로 인해 울분으로 잦아들 뿐, 분노로 폭발하지는 못한다. “실제로 있게 된다면 마음에 즐거움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은 그것을 희망하거나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쾌감을 준다. 이런 까닭에 역정을 내는 것은 쾌감을 준다. 마치 호메로스가 분기(憤氣)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던 것처럼. ‘그것(노여움)은 똑똑 떨어져 내리는 꿀보다도 훨씬 더 달콤하기에….’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앙갚음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역정을 내지 않으며, 자신들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역정을 내지 않거나, 내더라도 훨씬 덜 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욕망 속에는 어떤 쾌감이 따라온다. 왜냐하면 욕망이 채워졌던 일을 기억하거나 채워질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사람은 어떤 쾌감을 즐기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노를 비롯해 여러 가지 감정(pathos)을 규정하였다. 하지만 감정의 규정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조절하고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에게 ‘수사학’(rhetorike)이란 일종의 설득의 심리학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치에 맞는 말을 통해 사람들의 이성(logos)과 품성(ethos)과 감성(pathos)을 자기 생각에 대해 호의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연설가(rhetor)의 기술(-ike: techne)’이었다. 그 핵심에는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해주는 조건인 ‘이성과 말(logos)’이 있었다. 말을 통해 인간의 논리적 판단(logos)을 바꾸고 상대의 품성(ethos)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까지도 원하는 방식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있었다.

예를 들어, 연설가는 말을 통해 어떻게 대중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먼저 그는 대중들이 ‘그’나 ‘그들’에게 부당하게 무시당한 것이 아니라고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무시당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대중은 노여움을 가라앉힐 것이다. 대중이 당한 무시가 ‘부당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대중은 침착하게 자신을 돌아볼 것이다. 최악의 경우 상대가 대중으로서는 앙갚음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면, 대중은 억울하지만 참을 것이다. 상대가 보복할 가치가 없는 대상임을 일깨워준다면, 대중의 분노는 자연스럽게 상대에 대한 애처로움이나 동정, 또는 역무시로 바뀔 것이다. 이와 같은 감정의 조절을 위해 연설가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pistis)해야 한다. ‘피스티스’(pistis)라는 낱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대중이 확신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믿을 만한 증거’와 확실한 증거를 통해 전개되는 연설가의 ‘입증’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설가의 입증이 성공한다면 연설가는 대중의 분노를 풀 수 있다.
반대로 분노해야 할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대중을 분노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연설가는 먼저 대중이 부당하게 무시를 당했다는 판단을 합리적으로 내릴 수 있도록 입증해야 한다. 연설가의 입증을 받아들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면, 대중의 마음에는 분노의 감정이 끓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연설가는 대중에게 또다른 확신을 심어주어야만 한다. 즉 대중을 무시한 ‘그 사람’ 또는 ‘그 집단’에 대한 응징이 충분히 가능하며 정당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응징하지 않으면 계속 무시를 당할 수 있다는 비관적 미래상도 그려줘야 한다. 나아가 실현 가능한 복수의 방법을 적절히 제시한다면 대중을 실천의 현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리고 무시하고 무시당하는 관계가 사적인 원한과 불편한 관계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판단으로 이끌어간다면. 그래서 아직 사적인 원한 관계에 의해 피해를 당하지 않은 개인도 언젠가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희생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면. ‘사원’(私怨)은 ‘공분’(公憤)으로 수준을 달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적 보복이 아니라, 공적인 응징의 차원에서 사회적 모순을 척결하는 역사적 변혁을 꿈꿀 때, 분노는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도 훨씬 더 달콤한 꿈으로 피어날 것이다.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는 희망이 될 것이다.
문제는 정당한 입증이다. 거짓 정보로 대중의 판단을 교란하는 연설가들을 경계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하려고 했던 수사학은 오늘날 우리들의 영혼도 일깨운다. “연설의 수사학은 쓸모가 있다. 진리와 정의는 거짓과 불의보다 본성상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판정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거짓과 불의는 반드시 정의와 진리를 압도하고 말 것이다. 그런 일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