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기고

안재원: 원본과 정본 사이의 거리 어떻게 극복했나? (교수신문-20130422)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7.15 16:16 조회 1,355
원본과 정본 사이의 거리 어떻게 극복했나?
서양고전문헌학자들의 정본화 과정
2013년 04월 22일 (월) 12:22:27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학 editor@kyosu.net
서양고전학자들은 ‘원전’의 복원을 목표로 ‘정본’을 만든다. 하지만 그 ‘정본’은 원전에 가까운 무엇이지, 그것이 곧바로‘원전’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최초의 원본과 후대의 정본 사이에는 어쩔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어쨌든, 이 거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서양고전학자들은 여러 방법을 강구했다. 대표적인 것이 문헌전승의 사정과 사연을 풀어주는‘비판장치(apparatus criticus)’다.
‘비판’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갈지도 모르겠다. 이는 궁극적으로 편집자에 의해서 선택된 텍스트가 원저자의 그것이 아닐 수 있고, 독자들이 텍스트를 읽어감에 있어서 문헌전승 과정에서 생겨난 오류들 때문에 생겨날 수밖에 없는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라는 뜻이 담긴 언표다.
그러니까, 본문에 표기된 표현이 옳은 전승인지 혹은 비판장치에 병기된 표현이 정확한 전승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또한 텍스트 본문을 대함에 있어 어떤 편집자가 이른바‘校監’을 통해서 신뢰할 만한 정본을 만들었다 해도 텍스트의 다양한 전승 사정 때문에 원저자가 어떤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소리다. 이는 전승 과정에서 문제가 많은 본문 텍스트에 대해서 편집자가 정해준 텍스트를 곧이곧대로 따라 가지 말고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대하라는 일종의 요구인 셈이다. 물론 어떤 편집자가 권위도 있고 학문적으로 大家일 수 있다. 심지어 원저자보다 해당 분야에서 더 뛰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원저자가 아니다.
또 편집자가 아무리 라틴어에 뛰어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원저자가 활동했던 시대의 언어적 이해를 소유했다고 할 수도 없다. 종종, 옛날 문헌을 다루면서, 어떤 해당 분야의 텍스트를 다루면서 대가들이 종종 범하는 오류도 여기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에서, 원저자가 아닌한, 어떤 편집자도 그저 편집자에 불과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적어도 문헌 전승이 허용하는 한에서 여러 다양한 독법이 가능하며, 이를 편집에 반영한 것이 비판정본(editio critica)이다.
그런데, 문헌전승의 사정을 보면, 대개 문헌을 필사하는 중에 필사자들이 자신의 독법에 따라 텍스트를 교정하고 보충한 경우가 많다. 물론 필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단순 誤讀도 많다. 그런데, 이 오독들은 문헌 전승을 따지는 과정에서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필사본들에는 전승 문헌의 통사 구조가 이해되지 않는 경우 혹은 난독인 경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는 새로운 독법들이 많이 제안돼 있는데, 이 제안들은 텍스트의 이해에 있어서 또 다른 해석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렇게 다양한 해석 전통과 텍스트에 대한 여러 다양한 독법 전통을 기록해 줄 필요가 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비판장치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장치를 통해서 해당 텍스트에는 여러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제공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해석의 여러 다양한 가능성 덕분에 실은 원저자가 보지 못했던, 혹은 간과했던 사실들이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원전을 열린 텍스트로 만드는 일이 비판정본작업의 요체일 것이다. 어쩌면 고전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비판정본작업을 통해서, 이른바‘최초의 원전’은 보다 다양하고 보다 풍부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열린 텍스트로 재생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문헌 전승과 다양한 해석 전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원전이 비판정본이고, 문헌 전승과 교정 및 문헌 편집의 역사를 기록하는 자리가 비판장치이다.
비판장치에 기재되는 사항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 이미 필사본에 있는 잘못들을 찾아내(examinatio) 제거해 나가고, 텍스트를 원전에 가깝게 교정하는 과정(emendatio) 중에 생겨난 오류들이 기록된다. 다른 한편으로 다른 전승 전통이 있을 때 본문에 선택되지 않은 경우도 기재된다. 선대 편집자의 추정, 보충 제안들도 기록된다. 그런데 판본들이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편집자가 개입해 추측에 의거한 개선-제안들을 비판장치에 제시하기도 한다(divinatio aut coniectura). 이때 문헌 편집자는 편집 중에 명백하게 틀린 傳文이라 해도 함부로 지우지 않고 문헌전승 전통을 존중하며, 교정할 경우에도 전승된 텍스트를 삭제하지 않고 전승된 텍스트의 교정 제안들도 기록해야 한다. 더 나은 문헌 전승 전통에 서 있는 텍스트가 있을 수 있고, 후대 학자의 더 나은 해결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정 제안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립부터 현대까지 약 2천500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으로, 오늘날에도 지켜지고 있는 학자들의 古今간 의사소통방식이고, 르네상스 시대 이후 텍스트 구현 방식의 한 제도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비판장치는 한편으로 문헌 전승-전통을, 다른 한 편으로 문헌 편집의 역사를 보존하는 문헌-세계의 표현-제도인 셈이다.
18~19세기에 그리스와 로마 고전의 부활을 외치면서 서양 고전의 복원에 도전한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의 고전학자들이 각각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그들만의 시각으로 원전에 접근했다. 그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서 그들은 각각의 문화적, 사상적, 이념적인 고유성과 독창성을 창출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실은 어쩌면 비판장치 덕분일 것이다. 최초 원전과 후대의 정본 사이에 있는 거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이 비판장치이기에. 원전에 대한 또 다른 해석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보장하는 기제가 바로 비판장치이기에.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학
독일 괴팅엔대에서「알렉산더 누메니유의 단어-의미 문채론」으로 철학박사를 받았다. 키케로의『수사학』역서와「키케로의 인문학에 대하여」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