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기고

김헌: 자유시민의 실천 위한 철학을 찾아(디지털타임스-20131128)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7.15 16:21 조회 943

[디지털인문학] 자유시민의 실천 위한 철학을 찾아

 

입력: 2013-11-28 20:25
[2013년 11월 29일자 22면 기사]
 
[디지털인문학] 자유시민의 실천 위한 철학을 찾아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고대 아테네에는 흥미로운 소송이 있었다. `안티도시스'(antidosis)라는 소송이었는데, 번역하면 `교환소송'이다. 당시 아테네는 특별하게 돈이 필요한 경우, 부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 비용을 내라고 요구했다. 요구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유력 인사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겨 기꺼이 그 비용을 내곤 했다.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부자가 따로 있는데, 덜 부자인 자신이 비용을 내야한다면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그런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항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것이 바로 `교환소송'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아테네 해군에 `삼단노선'이 필요해서, 국가가 A에게 "당신은 부자니까 그 비용을 내시오."라고 요구했다. A가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A는 "저기 있는 B가 더 부자니까, 그 비용은 B가 내야 합니다."라고 항의할 수 있었다. B가 A의 항의를 인정하면, B가 그 비용을 내면 된다. 그러나 B가 펄쩍 뛰면서 거부하면 소송이 발생한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A보다 부자가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좋습니다. 저의 전 재산과 B의 전 재산을 통째로 바꿔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 비용을 내겠습니다."

실제로 교환소송 당사자들이 재산을 맞바꿨다는 기록은 없다. 극단적인 지경에 이르기 전에 서로 타협했던 것이다. 기원전 354년경, 82세의 노(老) `철학자'가 이 소송에 연루되었다. 누군가가 삼단노선 건조 비용을 내라는 요구를 받자, 이 철학자가 자기보다 더 부자라고 책임을 전가했던 것 같다. 실제로 그가 학생들을 가르쳐서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터였다. 더군다나 고소인은 이 철학자가 교육을 통해 `떼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그 교육 내용이 좋지 않아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까지 얹어 공격했다. 45년 전에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와 같은 죄목으로 또 하나의 철학자가 법정에 선 것이다. 이 철학자는 `이소크라테스'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은 많은 돈을 벌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한편,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말의 교육'을 통해 그리스 세계에 공헌하는 인재를 육성했다고 항변했다.

그에 따르면, `말'(logos)이란 영혼을 드러내는 그림 같은 것. 따라서 말을 잘 한다는 것은 영혼이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갖춘다는 것. 이때 `현명함'(phronesis)이란 주어진 상황 에서 시의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의견'(doxa)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리고 말을 통해 공공의 영역에서 동료시민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자유 시민에게 요구되는 참된 `지혜'(sophia)요, 그것을 추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지혜에 대한 사랑(philia)', 즉 `철학'(philosophia)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제자는 말솜씨로 논쟁에서 승리하려는 이기적인 편향성을 버리고, 공평무사한 판단력과 정직한 품성을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품성이 바르고 영혼이 아름다워야 거기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도 아름다운 법이니까.

법정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모양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사형을 당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서양철학의 전통은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플라톤 이후 사람들은 엄밀한 논증과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철학의 본령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로 인해 서양철학은 추상적인 이론과 관념의 세계를 구축하였고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철벽'을 세워두었다. 철학의 개념들은 배타적인 `은어'로 그 분야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현대의 철학자들은 플라톤이 그어 놓은 선 안쪽 영역에 머물면서 이소크라테스를 밀어냈다. 그의 `철학'이 실천적인 이슈와 상식에 근거한 대중적인 합의에 너무 기울어져 있어 `고유한 철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난 요즘,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본다. 서양철학을 통째로 재고하고 새로운 길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