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기고

김헌: 누가 세상을 만드는가(디지털타임스-20140123)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7.15 16:22 조회 1,115

[디지털인문학] 누가 세상을 만드는가

 

입력: 2014-01-23 20:36
[2014년 01월 24일자 22면 기사]
 
[디지털인문학] 누가 세상을 만드는가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누가 해와 달을 만들었을까? 할머니는 그 답을 주셨다. `가난한 어머니가 일 나갔다가 떡을 가지고 산을 넘어 오다가, 떡도 옷도 몸도 다 호랑이에게 빼앗겼단다. 호랑이는 엄마 옷 입고서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려고 왔지. 눈치를 챈 오누이는 꾀를 써서 하늘에 올라가고, 호랑이는 썩은 동아줄 타고 쫓아가다가 떨어져 죽었어. 하늘로 간 오누이는 해와 달이 되었단다.' 며칠 전에 할머니는 내 곁을 떠났지만, 할머니가 이야기해 준 세계는 잊을 수 없다. 낮과 밤을 맡았기에 만날 수 없던 오누이, 낮에 나온 반달을 보면서 오빠가 보고 싶어 나왔구나 생각하곤 한다. 그 때 나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세계 속을 사는 것이다. 해와 달을 누가 만들었냐는 물음에는 엄마 잃은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된 것이라 대답하겠지?

스티븐 호킹의 책에 따르면, 중앙아프리카에 사는 `보숑고' 족은 `붐바' 신을 믿는다. 어느 날 배가 아팠던 붐바가 해와 달을 하늘에 토해냈다. 보숑고 족은 해와 달을 만든 것은 붐바 신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답인가? 보숑고 족장은 정답이라고 할 것이다. 그들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신화가 그려주는 `세계' 속에서 생각하며 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해와 달을 만든 이는 `여호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가 만든 세상' 속에서, 달리 말하면, `여호와가 세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속에서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면, `여호와가 세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만든 이'가 기독교인들의 세계 속에 해와 달을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왜 신이 없는 우주에 살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과학적 사실과 논리를 명확하고 상세하게 소개해 줄 것이다"라며 <우주에는 신이 없다>를 쓴 밀스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의 버트란트 러셀,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들에게는 누군가가 세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허튼 소리다. 그들에게는 "누가 해와 달을 만들었나?"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우주를 만들어줄 신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실을 말한다고 주장하겠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들은 `우주에는 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우주에는 신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모습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어떤 `이야기' 속에 살며 그 이야기가 그려주는 `세계' 속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한다. 따라서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아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한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셈이다.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이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렇다. "세상을 만든 것은 그대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낸 이다!" 그리스의 용어를 빌리면, `시인'(poietes)은 `이야기를 짓는 사람'(mythopoios)으로서 사람들이 믿음으로 채택하고 깃들어 사는 `세계를 지어내는 사람'(kosmopoietes)이다.

새로운 과학 이론을 구성하는 사람도 세계를 지어내는 또 다른 의미의 `짓는이'(poietes), 즉 시인이다. 이런 뜻에서 밀스나 도킨스는 `세상을 만든 신이 없는 세상'을 만든 사람들이다. 하나의 신화, 철학, 과학, 종교는 인간 삶의 기반인 세계를 구성하는 의미체계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것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원리와 관심에 따라 사람들이 깃들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품성과 합리적 판단에 따라 자신이 살 `이야기'를 선택함으로써 `세상'을 선택하거나, 나름대로 새롭게 구축하여 그 세계의 주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치가도 하나의 시인과 같다. 그러니 우리 함께 더불어 살아갈 희망에 찬 세계를 그려낼 정치적 상상력과 시학적 창조력이 없는 사람은 이제 그만 정치판에서 꺼져 주었으면 좋겠다. 아, 따뜻한 아랫목에서 알콩달콩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살맛나게 해주셨던 할머니가 몹시 그립고, 또 그립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