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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 아름답고 뜻 깊은 `인문`을 위해(디지털타임스-20140926)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11.17 15:27 조회 1,496
[디지털인문학] 아름답고 뜻 깊은 `인문`을 위해
 
입력: 2014-09-26 05:02
[2014년 09월 26일자 22면 기사]
                 
[디지털인문학] 아름답고 뜻 깊은 `인문`을 위해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우리가 흔히 '글월'이라고 뜻을 새기는 '문'(文)은 원래 얼룩이나 결을 비롯해서 아로새긴 '무늬'를 가리킨다. 몸에 새기는 무늬를 '문신'(文身)이라 하고, 돌을 던져 이는 물결을 '파문'(波文)라 일컫는 것도 이런 이유다. 따지고 보면, 문자나 글씨도 종이 위에 수놓은 무늬다. <주역>의 '분괘(賁卦)'에는 '문'(文)을 둘로 나눴다. 하나가 인간의 무늬인 '인문'(人文)이고, 다른 하나가 하늘의 무늬인 '천문'(天文)이다. 조선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은 한 가지 '문'을 추가했다. 하늘을 수놓은 '일월성신'(日月星辰)은 '천문'(天之文)이고, 인간이 새기는 무늬가 인문인데, 거기에 덧붙여 들쭉날쭉 새겨진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땅의 무늬인 '지문'(地文)이라는 것이다. 그는 '시서예악'(詩書藝樂)을 '인문'이라고 지칭했는데, 그것은 종이에 붓으로 써넣는 문장과 서책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시서예악'의 형태로 표현된 인간의 행위가 모두 '인문'이다. 정돈된 논과 밭은 인간이 자연에 새겨 넣은 멋진 무늬며, 집을 짓고, 길을 닦고, 건물을 올리고 둑을 쌓는 일이 모두 인간이 자연 속에 새겨 넣는 '인문'이다. 그러니 삶의 터 위에 어떤 '인간의 무늬'를 새겨 넣느냐가 한 나라, 한 민족의 '문화'(文化) 수준과 '문명(文明)'의 실체를 결정할 것이다.

자기 삶의 경험과 깨달음을 말이나 글, 그림, 조각 등으로 남기는 행위도 모두 '인문'이며,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삶과 전통과 기술과 지식, 지혜의 무늬를 새겨 넣는 교육도 '인문'의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다른 사람의 인문을 받아들이며, 삶의 지혜를 찾는다. 나보다 더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성공과 실패의 기록들을 읽기도 하고, 생의 찬란한 순간을 담아낸 그림을 감상하며, 유구한 역사의 유물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남긴 삶의 흔적 속에서 나의 오늘과 내일을 새겨나갈 인문의 지혜를 얻는다. 그래서 이미 세상을 떠나간 사람들이 남긴 뜻 깊은 무늬들과 삶의 여운들을 깊이 통찰하고, 그 몸부림의 여파를 되살려 내 삶의 파동 속으로 끌어들이며, 나만의 무늬를 그려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받아들이고 남기는 일상의 핵심이며,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일 수 없고, 더군다나 이른바 '인문학자'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하루,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여주었던 모든 표정과 몸짓, 고백과 칭찬, 가르침, 심지어 질타와 욕설, 거짓말까지도 모두, 그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 넣는 나의 무늬, 곧 나의 '인문'이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 곰곰이 되짚어 본다. 난 오늘 어떤 무늬를 남겼는가? 우리는 모두 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 매일 매일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아름다운 무늬로 남든, 지저분한 낙서로 남든, 다른 사람을 한 없이 고통스럽게 하는 고문의 낙인처럼, 또는 따뜻하고 아련한 꿈을 꾸게 하는 입맞춤처럼, 곧 사라질 연기처럼, 또는 길이 남을 기념비처럼 다양한 형태의 인문을 남긴다. 어떤 인문을 남길 것인가, 그것이 그 사람의 삶의 모양과 가치를 결정할 것이다. 이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인문학적인 삶이다. 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병들게 만드는 모든 제도와 쓰레기 같은 설치물들은 인문학적 삶의 빈곤이 만들어내는 악독한 무늬다. 그런 무늬를 지워나가려고 혼신을 다하는 것, 그것은 인문학자만의 일이 아니라, 인문을 남기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단순히 학문만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 삶의 위기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것이다.

성서의 첫 페이지는 태초의 무(無)에서 시작한다. 신은 텅 빈 공허에 불현듯 빛을 새겨 넣었고, 창공과 뭍과 바다를 만들었으며, 땅에 풀과 꽃이 피워냈고 하늘에는 별이 빛나게 하였다. 그가 세상에 새겨 넣은 무늬들은 "보기에 좋았다". 그리스어로 된 '70인경'에는 그 표현을 "아름답다(kalon)"고 옮겼다. 우리가 그 신을 닮아 이 세상에 보기 좋은 무늬, 아름다운 인문을 남길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