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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 누가 눈먼 `부의 신`의 눈을 뜨게 할 것인가(디지털타임스-20141127)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12.03 10:48 조회 1,259

[디지털인문학] 누가 눈먼 `부의 신`의 눈을 뜨게 할 것인가

 

입력: 2014-11-27 19:35
[2014년 11월 28일자 22면 기사]

 
[디지털인문학] 누가 눈먼 `부의 신`의 눈을 뜨게 할 것인가
김 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코미디'(Comedy)는 '희극'(喜劇)이라고 번역된다. '즐거움을 주는 극'이라는 뜻인데, 누군가를 우스꽝스럽게 그려내고 풍자하는 맛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희극'으로 번역하는 '코미디'는 원래 영어단어가 아니다. 변두리를 뜻하는 '코메'와 노래를 뜻하는 '아오이디아'가 합해진 그리스 말 '코모디아'가 그 뿌리며, 원래 뜻은 '변두리의 노래'이다. 왜 변두리의 노래인가? 도심에서 떨어져 살던 농부들이 즐기던 노래였고, 주류에서 추방되어 변두리를 떠돌던 서글픈 아웃사이더의 노래였던 까닭이다. 그러니 '코모디아'에는 정치, 경제, 문화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한과 설움, 그리고 주류에 대한 날선 비판이 해학적 형태로 난무한다.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르던 아테네의 농민들은 적의 침략 때마다 애써 가꾼 농토가 쑥밭이 되는 참담함과 고통을 겪었던 탓에, 도성 안에서 뻐겨대며 편하게 사는 '도시 놈들'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봄이 될 무렵, 농부들은 디오뉘소스 신에게 기원을 올리려고 아테네 중심부에 있는 극장에 모였는데, 그곳이 한풀이의 걸 판진 마당이었다. 아웃사이더들의 울분을 대변이라도 하듯, 당대 최고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주류에 대한 한을 한바탕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멋들어진 희극을 무대에 올렸다.

"너에게 비밀을 말해주지." "나는 신을 경외하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늘 가난하고 못살았어." "신전에서 돈을 훔치는 자들, 말 잘하는 정치가들, 숨어서 남의 잘못이나 노리며 소송을 거는 자들, 그밖에도 수도 없이 많은 악당들은 다 돈을 벌었는데 말이야." 수수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한 아테네의 늙은 농부 크레뮐로스가 무대 위로 나와 하는 말이다. 그런데 왜 '부'는 정직한 사람을 외면하고 악당 곁에만 머무는 걸까? "그래서 나는 신에게 물어보기로 했어. 그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자신의 인생은 비참한 채로 끝나겠지만,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조차 자기처럼 법을 지키며 정의롭고 착하게 살면서 못살게 될까봐 한껏 걱정이 된 것이다. "그 애가 사는 법을 바꿔서 악당이나 정의롭지도 건전하지도 못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닌가 알아보려고 말이야. 그래야만 인생에서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이거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분 곁에서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는 사람은 우리가 어려서 배웠던 것과는 달리, 법을 우습게 여기며 남을 속이고 친구조차 이용하고 짓밟고 올라섰던 사람은 아닌가? 그래서 올바르고 건전하게 욕심 없이 살던 여러분의 지난날이 억울하고, 행여 여러분의 자식들이 윤리와 도덕을 삶의 지침으로 삼으려고 할 때, 덜컹 겁이 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왜 이런 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아주 심각한 문제지만, 그냥 한 번 웃어보도록 하자. 화가 단단히 난 아테네의 늙은 농부 크레뮐로스를 따라 가보자.

그는 아폴론의 신탁을 들은 후 집 앞에서 '부의 신'을 만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장님이다. 아, 그렇구나! 부의 신이 장님이어서 못된 사람이 잘 사는 거로구나! "어린 시절 나는 정의롭고 지혜롭고 단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만 찾아가기로 맹세했지. 그러자 제우스께서 나를 장님으로 만드셨어. 내가 그런 사람들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말이야." 크레뮐로스는 결심한다. 부의 신을 모시고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찾아가 눈을 뜨게 하겠다고. 기특하기 짝이 없는, 꼭 '심청'의 마음이다. 홀로 부의 신을 독점하고 엄청난 부를 누릴 수도 있건만, 그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정당하게 부를 누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그가 사익을 포기함으로써 부의 신은 눈을 뜨고, 마침내 올바른 부의 분배가 시작되었다. 정직하기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2,300여 년 전, 아테네의 희극 무대 위에서 벌어진 신나는 허구며 멋진 가상의 세계다. 그러나 그때처럼 지금도 부의 신은 아직도 눈이 멀어 있고, 세상은 그의 눈을 뜨게 할 '크레뮐로스'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오늘날, 가상의 무대가 아닌 우리의 실제 세계 속에서 누가 그런 '그'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