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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 나무에게서 삶을 깨닫다(디지털타임스-20150122)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1.26 16:15 조회 1,022
[디지털인문학] 나무에게서 삶을 깨닫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디지털인문학] 나무에게서 삶을 깨닫다
     입력: 2015-01-22 19:14
     [2015년 01월 23일자 22면 기사]


작년 초부터 웬만하면 차를 몰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걸었다. 지하철역에서 학  교 연구실까지 약 40분 정도 걸을 수 있는 산길이 있다. 차를 몰고 가면 40분이면 가는 길인데, 거의 두 시간을 들인다. 시간 낭비? 천만에. 지하철 안에서 나는 책을 읽기도 하고, 달게 졸기도 하며 몸을 아낀다. 산을 걷는 것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건강하게 해준다. 살짝 땀으로 젖은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다. 나의 스승님도 그 길을 30년 가까이 걸으셨고, 나의 벗도 그 길을 오래 전부터 걷고 있다. 가끔은 우연히 벗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날은 횡재한 기분이다. 두 시간을 들여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면 아까울 게 무어냐. 게다가 산을 걸으며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나무들은 세상의 흐름을 읽게 하고, 그 속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비추어보게 한다. 1년 동안 나무는 많은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 가운데 세 개를 골라본다.)

봄. 어느 날 파란 새싹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연한 연두색이 생생했다. 꿈을 다 털어낸 듯 깡마른 가지를 드러내고 고집스럽게 침묵하던 나무가 햇볕의 온기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친 가죽을 뚫고 나오는 새싹이 그토록 작고 부드럽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꿈을 꺾고 끙끙 앓다가 죽은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봄이 올 줄 알았던 것일까? 아니, 내 눈엔 '봄이 안 오면 어때?'하는 것만 같이 체념한 듯, 퉁명스러워 보였다. 너무 추울 때, 나도 봄이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고, 그래서 나무도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를 나무가 몹시 부끄럽게 했다. 싹을 키우는 것은 봄이 온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싹을 키우는 것 자체가 나무의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운명을 묵묵히 견뎌내는 나무가 끝내 봄이 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나무는 침묵하고 있었지만 수동적으로 봄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새싹은 나무의 당당함이었다.

여름과 가을 사이. 바람이 아주 세게 불었다. 맞바람을 맞으며 산길을 걷는데, 바람에 나뭇잎들이 뜯어지듯이 몸부림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무는 셀 수 없이 많은 나뭇잎들을 꼭 붙들고 묵묵히 바람을 버티고 있었다. 아, 나무 녀석. 나 보라는 듯이 저렇게 힘차구나. 나무의 거친 주름은 수많은 잎사귀들이 끊임없이 질러대는 아우성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였다. 그도 더 거센 바람이라면 버티지 못하고 뿌리를 드러내며 쓰러지겠지? 나무의 파멸은 아주 작은 잎사귀의 흔들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무는 나뭇잎들 하나하나를 꼭 붙들고 주름이 깊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안간힘을 쓰며 바람을 견딘다면 나무는 더욱 단단하게 자신을 지키며 수많은 나뭇잎들을 거느릴 것이다. 나는 마음을 괴롭히는 수많은 고민들을 다 털어내려고만 했는데, 바람이 몹시 세게 불던 그 날, 나무는 의연하게 나이테를 하나 더 단단히 늘려가고 있었다.

겨울. 눈이 내렸다. 낙엽을 덮었다. 가을 위로 덮인 겨울을 바라보며, 어쩌면 나무가 잎을 떨어뜨린 채로 헐벗은 것이 아니라, 땅에 묻혀 있던 뿌리를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무가 물구나무를 섰다는 것이다. 하나씩 둘씩 살을 에듯 잎을 땅에 떨어뜨릴 때, 사실 나는 그것이 내내 수상했다. 어쩌면 나무는 잎을 떼어내 버린 것이 아니라, 하늘로 향하던 머리를 땅에 묻고, 뿌리를 드러내 하늘로 뻗기 위해 잎을 먼저 땅으로 내려 보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퇴색한 저 낙엽들은, 사실은 땅 속에서 여전히 푸릇푸릇한 나뭇잎들이 벗어 놓은 허물들에 지나지 않는다! 땅에 떨어진 잎들은 허물을 벗어 던지고 땅으로 꼬물꼬물 기어들어가 물구나무를 서서 땅에 박힌 가지와 다시 조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무가 잎을 버릴 리 없어. 아니 잎이 나무를 그리 쉽게 떠날 리 없어. 나는 그들을 무한히 신뢰하는 상상을 했다. 그래, 땅 위는 얼어붙었지만, 그 속엔 푸르른 잎이 만발할 거야. 나무와 잎의 아름다운 관계가 부러웠다. 그렇게 한 세상 살아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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