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기고

김헌: 우리시대 `수사학`이 필요한 이유(디지털타임스-20150723)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7.27 15:36 조회 994
[디지털인문학] 우리시대 `수사학`이 필요한 이유
김 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디지털인문학] 우리시대 `수사학`이 필요한 이유

 

입력: 2015-07-23 19:14
[2015년 07월 24일자 22면 기사]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구약성서는 이렇게 답한다. 세상의 시작점에 신이 말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빛이 생겨나 어둠을 뚫고 나왔고 세상은 아름답게 비롯되었다. 말의 힘은 정말 대단했다. 신은 말 한 마디로 빛을 만들었고, 그의 말에 따라 혼돈에 휩싸였던 공허한 땅이 질서와 꼴을 잡았으며, 떠돌던 물이 터의 무늬를 따라 흩어지고 모여들면서 제자리를 잡았다. 꽃과 나무들이 피어나고 해와 달과 별들이 빛났으며 새와 짐승들이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 모든 창조가 말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약성서는 세상을 만들고 아름다운 질서를 부여한 신이 곧 말, 즉 '로고스(logos)'라고 했다. 이보다 더 말의 힘을 강조한 문서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우리말 속담 '말 한마디에 천 냥의 빚을 갚는다.'도 말이 얼마나 센가를 보여준다. 말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키워온 강력한 무기다. 실체도 없이 바람처럼 흩어지는 공허한 환영 같지만,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축적하고 새로운 정보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언어를 통해 확보한 정보를 이용하여 인간은 신체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험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간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한마음 한뜻이 되고, 서로 믿고 연대하여 사회를 구성했으며, 살아나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생산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 인간이 말을 발명해낸 것은 뇌를 고도로 발전시켰던 독특한 생존전략의 덕택이었다. 다른 동물들이 발톱과 이빨과 근육을 키우는 동안, 인간은 뇌를 진화시키는 데에 전력을 투구하였고, 머리를 많이 쓴 결과 고도로 복잡다단한 말의 체계를 조직해냈다.

말의 힘에 주목했던 그리스 사람들은 말이 가장 잘 작동할 수 있는 사회를 구상했다. 완력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폭력을 거부했고,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제멋대로 힘을 부리는 일을 천박하게 여기며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삶의 방식을 고안했다. 그것은 말로써 사람들을 설득하고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여 공공의 의견을 결정하는 정체(政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적 논의와 권력의 주체가 되는 민주정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던 참 독특한 체제였다. 아테네는 민주정을 확립하고 시민에게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었다. 그 안에서 무럭무럭 힘을 키운 시민들은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거대 제국 페르시아가 대규모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나가 싸웠다. 그들에게 진다면 그들은 노예로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못한 일이었다. 꿀보다도 더 달콤한 자유를 맛본 아테네인들은 그 맛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민주와 자유의 힘은 위대했다. 아테네인들이 이겼다. 그들은 승리에 감격하면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자유민이고,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각오가 단단하다. 그러나 저들은 한 사람의 군주에 복종하는 노예였다. 그들은 왜 싸워야 하는지를 몰랐고, 지켜야 할 것이 없었다. 자유민과 노예의 싸움은 숫자의 크기에 그 승패가 좌우되지 않는다. 우리의 승리는 당연하다. 노예가 자유민과 싸워 이긴 역사는 없으니까." 아테네에는 뛰어난 연설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적의 거대한 침략에 직면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었다. 완력으로 강요한 것도 아니고 돈으로 매수한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왜 싸워야 하는지를, 왜 싸우면 이길 수 있는지를 말로 설명하고 설득한 것이다.

설득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설득은 하나의 여신이었다. 말로써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 용기를 갖게 하는 언어의 마법, 막다른 골목에서 돌파구를 찾아내며 절망의 폐허에서 희망의 왕국을 짓는 언어의 연금술, 그것을 그리스인들은 수사학(Rhetorike)이라고 불렀다. 공공의 이익을 고민하는 데서 출발하여 시민의 동의와 참여를 끌어내는 설득에서 완성되는 수사학이 건전하게 작동하는 곳에서 민주주의는 활력을 찾는다. 그러니, 이 땅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척박한 것은 참된 수사학이 없이 민주주의를 하려니까 그런 것 아니겠는가.

김 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