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소개

연구

이해와 익숙함 사이에서 - 윤회는 끔찍한 것인가?

  윤회는 과연 고통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일은 어떤 일인가. 옛날부터 인간은 끊임없이 이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하려 했으며, 유사한 물음을 간직한 채 우리는 그러한 과거의 지적 노력의 결과물들을 세계관의 형태로 배우고 습득하며 받아들인다. 그런데 배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하던 것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아주 많은 경우 우리는 사실 그냥 익숙해지는 데 그치지 않는가? 특히 인도철학이나 불교 분야에서 아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익숙해짐, 그리고 단순히 익숙해지기만 한다는 것의 힘이다. 물론 익숙해지는 데 어려운 것도 있고 쉬운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마침내 익숙해지고 나면, 익숙해진 사람들은 아주 많은 무게를 실어 자신이 익숙해진 것을 설파하곤 한다. 사실은 익숙해진 것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 혹은 모른다는 듯. 그리고 자신이 익숙해진 그것이 사실은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유일한 진리라는 듯. 그래서 그렇게 진리의 담지자 놀이에 빠져있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겠다는 의도가 없는 한 우리는 보통 그들의 주장에 대해 입을 다문다. 그냥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무언의 공감’에 대한 가능성 정도를 열어주는 선에서 예의를 지키며. 그러나 그 결과 우리가 얻는 것은 세계와 삶에 대한 납득가능한 설명이나 공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우리는 다만 믿음이라는 것의 불가사의한 힘을 확인하게 될뿐이다. 인간은 믿겠다고 작정하고 덤비는 이상 그 무엇이든 믿을 수 있으며 그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설명들을 끝도 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간단하지만 직설적으로 그리고 무척이나 불편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게 중요한 순간들이 있다. 답을 미리 정해두고 던지는 질문도, 정해진 답을 끌어내기 위해 떡밥으로 던지는 질문도 아닌, 실제로 궁금한 것을 있는 그대로 묻는 진짜 질문 말이다. 특히나 상식과 현실에서 좌절감과 상실감을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은 인도의 ‘심오한’─듣는 이뿐만 아니라 말하는 이도 모르는 상황을 가리키는 데 쓰는 아주 특별한 전문용어다─진리 앞에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꾸벅꾸벅 조는 것이 아닌 바에야 아마도 익숙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불교의 경우에도 상황이 다르지 않아, 이해불가한 이야기─이런 것들을 줄여서 ‘헛소리’라 한다─는 이해불가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무엇보다 참되고 더욱 더 큰 권위를 갖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모든 불편한 질문들을 ‘심오한’ 진리와 가르침 아래 덮어버리려는 이들을 마주하게 될 때, 바로 그때가 속을 근질거리는 진짜 질문들을 덮지 말고 끄집어내야 할 때다.

필자가 이런 질문을 던지겠다고 하는 이유는 필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계속 던져보는 질문들을 필자 자신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첫째 질문은 바로 윤회가 과연 고통인가 하는 것이다. 살았던 사람이 죽었다 해서 그 사람이 아예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문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함께 숨쉬고 희로애락을 같이 하고 대화를 나누던 이가 죽는다고 해서 흔적도 없이 아예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더 어렵다. 그래서 어느 문화권에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가 있었다. 죽은 이가 이 세상에 돌아와 다시 삶을 살게 된다는 윤회 개념이 그중 하나인데,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인들도 윤회를 믿었으며 윤회는 세계 문명사에서 볼 때 희귀한 사고방식이 결코 아니다. 다만 각 문화권에 따라 그 구체적 내용은 아주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도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윤회라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실 너무나 평범한 세계관일 뿐이다. ‘윤회’와 정확히 동일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자들도 산 자들과 똑같은 일을 겪고 똑같은 일로 고민하며 똑같은 일로 행복해한다는 믿음 역시 전세계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윤회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사는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죽은 이들의 세계를 고대인들은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니 산 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들 역시 이왕이면 행복하고 즐겁게 잘 사는 것이 좋은 것은 당연지사이며, 따라서 내가 알던 이가 죽었다면 더더욱 그 이의 행복을 빌어주고 그가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점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홍콩에서 죽은 자들을 위해 돈이나 외제차 모형을 태울 때, 한국에서 저승길을 도와줄 꼭두를 만들어 상여에 달아줄 때, 이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세상에서 다시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윤회는 새로운 시도의 가능성에 대한 보장이며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위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해탈을 최고 목표로 삼는 수많은 전통들이 윤회는 나쁜 것, 반드시 피해야 하고 되도록 빨리 탈출해야 하는 비극적인 일이라 가르친다. 왜 윤회를 그렇게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윤회는 정말 그리도 나쁜 일인가? 이 물음에 독자 개개인이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지금 문제가 아니다. 필자가 지금 따져보고자 하는 것은 고대 인도인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윤회를 끔찍한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윤회가 끔찍한 일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이거나 믿지 못하는 한, 최소한 교리적이거나 철학적 의미에서 불교도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이는 또 교리나 철학과는 상관없이 불교도가 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실제로 그렇게 불교도가 되고 불교도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자신의 죽은 부모가 내생에서 잘 지내기를 기원하면서 천도재를 지내는 일은 사실 자기 자식이 대입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를 바라거나 자기가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윤회가 끔찍한 일인지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만약 윤회가 끔찍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 윤회 과정에서 끔찍하지 않게 살 수 있게 더 많이 제사를 지내고 더 많이 기도를 하고 해야 할 일로 받아들여 질 뿐이다. 어쨌거나 지금 물음은 불교도인지 그 여부와는 상관없이 왜 붇다를 포함한 고대 인도인들은 윤회를 끔찍하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점이다. 미리 말하자면 윤회는 당연하게 끔찍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이 당연하게 끔찍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윤회의 관념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을까의 질문이 역사적으로 윤회를 얼마나 좋은 것 혹은 나쁜 것으로 생각했는지와 연관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윤회가 끔찍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맥락은 윤회 자체에 대한 믿음과는 별도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다. 이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