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문명학교한국일보 2009/04/15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09.04.16 11:35 조회 1,403
인문학에 길을 묻고… 노숙인, 지하도 밖으로 행군하다

서울대성프란시스대 노숙인 대상 강좌 운영
공자·니체·들뢰즈… 꼬리문 질의·토론 '열기'
'밥대신 삶의 의지' 전하며 노숙인 자활 큰 몫
 
9일 오후 7시 서울대 인문대 신양관에선 '공자의 윤리학'을 주제로 한 강좌가 열렸다. 김월회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의를 듣는 이들은 다름아닌 전ㆍ현직 노숙인들. 노숙인 교육기관인 성프란시스대학(학장 임영인 신부)이 서울대 인문학연구소(소장 김남두 교수)의 지원을 받아 개설한 인문학 심화과정의 첫 시간이다.
국내 최초로 2005년부터 1년 과정의 노숙인 인문학 강좌를 운영 중인 성프란시스대학은 올해 처음 심화과정을 개설했다. 더 깊은 배움에 목말라 하는 수료생 및 재학생을 위한 자리로, 20회에 걸쳐 세계 문명과 철학을 강의한다.
강좌 개설을 주도한 안성찬 서울대 독문과 교수는 "3년간 노숙인들을 가르치면서 이들의 높은 교육열을 계속 충족시켜줄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5기 재학생 18명과 수료생 10명이 참석한 가운데 2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강의는 <논어> <예기> 등 동양 고전과 니체, 들뢰즈 등 서양 사상을 횡단하는 녹록지 않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조는 사람 하나 없었고, 질문은 날카로웠다.
공자의 중용(中庸)은 범접 못할 경지가 아닌 누구든 노력해 얻을 수 있는 덕(德ㆍ힘)이라는 교수의 해석에 한 수강생은 "힘뿐 아니라 지혜를 겸비해야 치우침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중용이 어려운 것 아니겠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논어>에도 지(知)와 예(禮)를 중용의 또 다른 덕목으로 꼽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이는 "<성경>처럼 공자 사상도 결국 제자들의 기록이므로 공자가 생각한 중용의 참뜻을 알 수 없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강의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질문이 이어지자, 결국 진행진이 나서 수강생들을 말려야 했다.
밤이 깊어서야 강의실을 나선 수강생들은 뿌듯한 표정이었다. 4기 수료생 권모(57)씨는 "서울대에서 공부하니 명문대에 편입한 듯해 기분 좋다"며 웃었다. 정장 차림의 임모(51ㆍ5기)씨는 "강의를 들을 때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생계 해결도 버거운데 인문학 공부는 사치 아니냐는 물음에 수강생들은 "밥보다 중요한 것이 삶을 변화시킬 의지"라고 반박했다. 최모(45ㆍ2기)씨는 "돈과 출세만 바라보고 살다가 노숙자가 돼서 절망할 때 인문학은 '세상에 나를 맞추는 삶을 버리라'고 충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노숙 생활을 청산하고 돈벌이보다 자아실현을 위해 살고 있다"며 "하찮게 살지 말라는 주변의 타박에 맞서 소신을 지킬 힘을 얻으려고 다시 강좌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10년 전 사업 실패 이후 알코올 중독과 언어 장애에 시달렸던 문모(50ㆍ4기)씨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삶이 통째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진정한 자유인인 조르바가 내게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날로 문씨는 술을 끊었고 상담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임영인 신부는 "인문학 강좌 수료율이 65%에 달하고, 올해는 20명 정원에 55명이 몰려드는 등 지원율이 해마다 높아진다"며 "숙식을 해결하려 정처없이 떠도는 노숙인들의 삶에 비춰볼 때 의미심장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인문학을 통해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프로그램을 '클레멘트 코스'라고 부른다. 성프란시스대학의 심화과정 개설이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의 질적 향상을 뜻한다면, 서울시가 경희대, 동국대, 서울시립대, 성공회대와 함께 노숙인과 저소득층을 상대로 열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과정은 양적 성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