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쿠오바디스와 행로난](12) ‘베끼기’서 탄생한 기술-안재원(경향신문 20160923)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10.05 09:14 조회 833
[쿠오바디스와 행로난](12) ‘베끼기’서 탄생한 기술-안재원(경향신문 20

[쿠오바디스와 행로난](12) ‘베끼기’서 탄생한 기술, 인문학에서 창조의 통찰과 이해 베껴야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ㆍ기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상아로 만든 조각품에 혼을 불어넣는 피그말리온. 장 밥티스트 레그노의 1758년 작품.
상아로 만든 조각품에 혼을 불어넣는 피그말리온. 장 밥티스트 레그노의 1758년 작품.
“기술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기술은 자유교양학문과 혼인해야 한다. 인문학과 결혼해야 한다. 이 결혼은 우리의 심장으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도록 만든다.” 스티브 잡스의 말이다. 잡스는 이런 소리를 왜 했을까? 인문학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기술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런 말을 한 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진의는? 무한경쟁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만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이제 기술이 아니라는 의미다. 즉, 가격 아니면 콘텐츠라는 소리다. 잡스는 콘텐츠를 선택했고, 그가 인문학을 강조하게 된 속내라고 본다. 인문학을 강조한 이유는 또 상품의 고급화 전략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해 ‘기술과 인문학은 결혼해야 한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잡스의 입장은 이해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잡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아이폰’이라는 상품의 콘텐츠에 국한되는 그 무엇이 결코 아니다. 물론, 인문학을 기술과 상품의 세계에 화려하게 등장시켜준 잡스의 공은 높이 산다.

■아이폰은 작품이 아니다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신형 아이폰을 선보이고 있다.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신형 아이폰을 선보이고 있다.
잡스의 선배 두 사람을 증인으로 부르자. 먼저 피그말리온이다. 오비디우스가 전하는 이야기다. “그는 눈처럼 흰 상아를 놀라운 솜씨로 성공적으로 조각했소. 이 세상에 태어난 어떤 여인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었소. 그는 자신의 작품에 반해버리고 말았소. 그 얼굴은 진짜 소녀의 얼굴이었기에. (…) 그만큼 그의 작품에는 기술이 들어 있었소. 피그말리온은 보고 감탄했고, 자신이 만든 형상을 마음속으로 뜨겁게 열망했소. (…) 그의 손가락에 그것의 살이 눌리는 것 같았소. 그러면 거기에 멍이 들지 않을까 두려웠소.”(<변신이야기>, 제10권 247~258행)
 
상품이 작품이 되는 순간이다. 어쩌면 이것이 잡스가 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물품이 아니라 혼이 깃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잡스가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에 하나의 일회용 물품이 아닌 낱낱의 상품에 개성을 부여하고 뭔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새겨 넣으려고 시도했다는 점은 획기적이다. 이것이 잡스가 인문학을 이용한 상품의 고급화 전략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급화의 전략이 기술을 예술로 만들 정도의 힘을 지닌 것은 아니다.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는 마음 혹은 정성이 깃들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신의 의지이다. 그의 말이다. “피그말리온은 제물을 바치고 나서 제단 앞으로 다가서서 ‘신들이시여, 그대들이 무엇이든 다 주실 수 있다면, 원컨대 내 아내가 되게 해주소서. 내 상아 소녀가!’라는 말을 차마 못하고, ‘내 상아 소녀를 닮은 여인이’라고 말했소. 친히 축제에 참석하고 있었던 황금의 베누스 여신은 그 기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소.”(<변신이야기>, 제10권 273~277행)
기술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다. 작품에 혼이 깃들 수 있도록 베누스 여신의 마음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기술에 무엇이 부족한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랑이고,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의 정성이다. 이 순간은 또한 기술을 넘어선 그곳에 인문학이 위치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리 개성을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단적으로 ‘아이폰’은 단품의 물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졌다 해도 몇년 쓰면 바꿔야 하는 소모품이다. 이런 까닭에 잡스가 아무리 노력을 쏟아부었다 해도 그의 상품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작품은 시간을 견디고 세월을 뛰어넘는 힘을 스스로 지녔을 때에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잡스는 인문학을 기술에 너무 싼값에 시집보내려 한 셈이다.

■기술은 모방이다
기술과 인문학의 혼인은 불가능한 맺음이다. 둘 사이에 얽힌 출생의 비밀 때문이다. 이를 해명해줄 플라톤을 초청해보자. “모방이 무엇인지를 대체로 내게 말해줄 수 있겠는가? (…) 그런데 각 가구의 장인은 그 이데아를 보면서 저마다 우리가 사용하는 침상들이나 식탁들을 만들며, 또한 여느 것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만든다고 우리는 또한 말해 오지 않았던가? (…) 곧바로 해와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이며, 곧바로 땅과 자네 자신, 여느 동물들과 도구들, 식물들 그리고 방금 언급된 모든 것도 만들어 낼 것일세. (…) 세 가지 침상이 있네. 하나는 본질에 있어서 침상인 것이고, 이는 신이 만드는 것이네. (…) 다른 하나는 목수가 만드는 것일세. 다른 하나는 화가가 만드는 것이네. (…) 이 점을 생각해보게. 그림은 각각의 경우에 어느 것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어지는가? 실재를 대상으로 모방하는가 아니면 보이는 것을 대상으로 하여 모방하는가? (…) 그 화가가 훌륭할 것 같으면 목수를 그린 다음 멀리서 보여주어, 진짜 목수인 것처럼 여기게 함으로써 아이들이나 생각 없는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게 하네.”(<국가>에서)
플라톤에 따르면 ‘침대는 과학’이 아니라 ‘침대는 모방’이다. 부연하면, 이데아 세계에 속하는 침대의 이데아가 요컨대 모상(母象)이고, 현실 세계에서 만들어진 침대는 그 원상을 베낀 것인 자상(子象)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머니와 자식이 혼인을 맺을 수는 없는 관계이다. 인문학을 기술에 결혼시키려 한 잡스의 시도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시도라는 얘기다. 플라톤에 따르면, 기술 너머의 세계에 있는 혹은 기술이 관장하는 모방의 원상을 다루는 학문이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술과는 근본적으로 위상이 다른 무엇이 철학이다. 고작 모방을 관장하는 것에 불과한 기술이 ‘감히’ 철학에 수작을 부리는 것 자체가 플라톤 같은 본질주의자에게는 기분 나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문명이 그렇게 ‘침대는 과학’이라고 외치고 그것이 현실에서 먹히는데.
어쩌면 이보다 더 극적으로 플라톤의 생각을 뒤집는 경우가 피그말리온의 사례이다. 모방된 것을 모방한 것에 불과한 것에 혼까지 불어넣으려 했고, 오비디우스는 그것이 성공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잡스가 침대 장사를 했다면, 그는 “침대는 예술”이라고 선전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식탁은 먹을 수 없다
내가 잡스의 생각에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인문학과 기술을 혼인관계가 아닌 부모와 자식 관계로 묶어두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식이 뭔가 혼날 짓을 하면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어야 하듯이, 기술도 가끔은 혼이 나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술이 대개는 효자 노릇을 해 온 게 사실이다. 지금의 문명을 유지함에 있어서도 기술이 필수적인 것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기술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돈을 너무 밝힌다는 것이다. 그런데, 돈을 너무 좋아하면 그 말로가 이렇다고 한다. 황금을 사랑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선물을 악용할 운명을 타고난 왕은 ‘내 몸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누런 황금이 되게 해주소서’라고 말했다. (…) 미다스 왕은 흐뭇한 마음으로 떠나며 자신의 재앙을 기뻐했다. 이것저것 만지면서 약속이 과연 진실인지 시험해보았다. (…) 가지는 황금이 되었다. 돌은 금빛으로 빛났다. 흙덩이를 만졌다. 황금이 되었다. (…) 하인들이 진수성찬을 차려왔다. (…) 탐욕스러운 이빨로 빵을 먹으려 하면 이빨에 씨ㅂ히는 것은 얇은 황금 조각뿐이었다.”(<변신이야기>, 제11권 102~124행) 황금을 너무 좋아하면 결국은 굶어죽는다는 경고이다. 기술이 귀담아들어야 할 경고이다.

■이 결혼이 진짜 싫은 이유는?
기술과 인문학의 혼사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가 있다. 잡스의 기획대로, 인문학과 기술이 예컨대 ‘아이폰’이라는 상품 안에서 서로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 인문학이 기술을 통해 상품화되는 것에도 찬성한다. 이를 통해 인문학에 기술의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시대의 요청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를 ‘디지털 휴머니티’라고 부른다. 반대로 기술에 인문학이라는 심장을 내부 동력기관으로 달아주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잡스가 시도했듯이 말이다. 기술의 혁신은 기술 내부로부터도 오지만 기술 외부의 필요에 의해 오는 경우가 더 많고, 실은 장사에도 이것이 더 결정적이다. 아마도 이 점을 조금 일찍 꿰뚫어본 사람이 잡스일 것이다. 기술도 이제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해야 하고, 그럴 수 있을 때에 생존이 가능하다는 점을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기술과 인문학의 결혼을 주장했을 것이다. 세계를 상대하는 학문이 결국은 인문학이기에.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잡스가 인문학과 기술을 이어주는 매개물 혹은 다리를 통하지 않고서 이 둘을 강제로 짝짓게 하는 현장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요즈음 여기저기서 인문학을 공학과 경영학에 강제로 시집보내는 일들을 실제로 하고 있다. 그것도 국가가 나서서 말이다. 대학도 장단을 맞추는 모양새다. 그러다가 탈난다. 이른바 ‘이화여대 사태’가 그 사례다. 근본적으로 어머니를 자식에게 시집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이디푸스의 패륜을 저질러서는 안되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종자를 먹어서는 안되며, 아무리 허기가 진다고 식탁을 갉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술이 아무리 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문명의 종자 씨앗은 아니다. 문명의 종자 씨앗은 누가 뭐라 해도 인문학이다.

■제대로 베끼는 법부터 연구하고 가르쳐야!
물론, 인문학과 기술은 서로 만나기는 만나야 한다. 인문학과 공학은 어떻게 만나야 할까? 만날 수는 있을까? 공학과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인문학은 대체로 상품 홍보에 필요한 문구 정도를 만들어주는 업종 정도로 여기는 게 현실이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굳이 못 만날 것도, 안 만날 이유도 없다. 어쩌면 산업과 공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인문학 하는 사람들에게 하소연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인문학의 콘텐츠가 실은 기술이 모방하려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기술의 원자재라는 뜻이다. 잡스는 이를 조금 일찍 보았을 뿐이다.
국제 경쟁력에서 갈수록 밀리는 한국 제조업의 현재 위치는 안타깝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더 이상 베낄 나라가 없다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앞으로 무엇을 베껴야 할 것인가 혹은 무엇을 새롭게 만들어 다른 나라와 회사로 하여금 베끼게 할 것인가가 관건일 텐데, 만든다는 것이 무엇이고, 베끼는 것이 무엇을 모방하는 것이며, 새로운 것은 어떤 방식으로 탄생하는지에 통찰과 이해의 부족이 바로 그것이다. 굳이 플라톤에게 하소연하지 않겠다. 그 이해와 통찰을 다루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다. 만듦이 실은 베낌이고, 그 베낌의 원상을 다루는 것이 철학이다. 혹은 상품을 작품으로 만드는 힘이 예술이고, 이런 힘을 소유한 철학과 예술이 인문학의 본령이다.
한국 인문학도 반성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근대화를 성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제조업과 산업의 곁불이지만 그 혜택을 누렸다면, 인문학의 관점에서 제조하는 일, 즉 ‘만드는 일’의 근본적인 원리와 구조가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것 정도는 정리해주었어야 한다. 어쩌면 지금 한국 인문학이 겪고 있는 치욕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제대로 베끼는 법이라도 연구하고 제대로 가르쳐야 했기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31920005&code=960205#csidxcfbaa1cd015d4ec9c95b33d61f9be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