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안재원(교수신문 20161017)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11.16 09:51 조회 277
자유, 정의, 평등, 공평, 민주, 공동체, 사랑, 자비, 인의, 진리, 진실, 양심, 연민, 동정, 관용, 연대, 홍익, 인류애, 인간애, 자기애, 겸손, 절제, 정직, 성실, 근면, 검소, 배려, 희생, 관용, 신의, 평형, 균형, 화합,  평화, 조화, 용서, 이해, 감동, 섬김, 나눔, 베품, 용기, 절제, 지혜, 실천, 통찰, 융통성, 중용, 이성, 합리, 상식, 원칙 …….
이것은 누구나 아는 가치들이다. 이 가치들은 적어도 개념의 이해 수준에서 여러 다양한 표현 매체를 통해서 출판되고 방송된다. 이들은 예술 작품과 영화 작품으로 표현되거나 대학의 교양 및 전공 강의를 통해서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소개되며 교육되고 있다. 또한 이들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도 이미 중등 교육에서 충분히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개념적인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 개념에 담긴 가치들이 현실에서 서로 충돌할 때 어떤 해결책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치들이 서로 충돌할 때, 과연 이를 평화롭게 해결해 본 경험이 있었는가. 예를 들어 한국 정치를 나누고 있는 세력들의 이면에 깔려 있는 가치들로서 자유와 평등을 들 수 있는데, 양자가 대립할 때 이들의 충돌을 해결하는 방법에 관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이런 가치들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분야가 정치인데,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서 해결되기보다는 세력 간의 힘겨루기를 통해서 정리되거나 제압되는 것으로 많은 충돌 사태들이 일방적으로 종료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점에서 나는 우리는 가치 충돌을 해결하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보는 이유는 이런 종류의 사태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더욱 악화되는 방향으로 고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어느 누구도 이 문제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않는다. 물론 ‘국회선진화법’ 같은 법이 제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 오죽하면 이런 법을 제정했겠는가라는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째든 이 법으로 산적한 현안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는 심히 의문스럽다. 기껏해야 물리적인 충돌 정도를 막는 장치에 불과하기에 하는 말이다. 결국은 가치들의 충돌을 대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관건일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 사실, 어려운 물음이다. 그럼에도 아예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다음 물음들에 답을 할 수 있을 때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다음의 물음에 대해서 시민들이 아니 사회의 지도층에 속하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밝힐 수 있을 때 말이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가치의 소중함을 몰라서 혹은 평등의 귀중함을 몰라서 서로 반대하고 충돌하는 것일까?” 이 가치들을 바탕으로 자라난 이를테면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어떤 관계에 있는 정치 이념일까?”, “자유와 평등은 본성적으로 대립적이고 상충적 관계일까 아니면 양립 가능하며 상보적인 관계일까?” 등의 물음들이 일상의 대화에서도 논의될 때 말이다. 아쉽지만, 이런 물음들은 수업과 강의에서도 깊게 다뤄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단적으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시험 문제를 보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우리가 하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정의를 위해서 폭력은 정당화되는가? …….
프랑스는 왜 이런 종류의 물음들을 입시에 내는 것일까. 이런 물음들이 결국은 개인의 삶의 질과 사회의 성격과 국가의 품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성숙함을 유지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이와 같은 방식의 입시 제도라는 소리다. 이 물음들은 개념을 암기하는 것으로는 결코 답을 할 수 없는 것들로, 날카로운 분석과 깊은 사유의 힘을 요구한다.
또한 이 물음들은 실은 아주 오래 된 것들이며, 앞으로도 계속 반복돼 부딪히게 되는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고전적인 물음들이다. 이 물음들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오래되고 검증된 책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이 물음들은 “다음 중 아닌 것은?” 유의 시험 방식에 최적화된 사람들이 풀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한다.
 
결론은 간단하다. 바꿔야 할 것은 바꿔야 한다. 적어도 프랑스 입시 문제에 나오는 물음들에 대해서 한국의 정치인들이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개진할 수 있을 때, 이른바 한국적 문제들에 대한 대승적인 해결 방안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성장 사회에서 성숙 사회로 나아감에 있어서 교육적으로 새로운 모색이 요청된다는 소리다. 입시 방식의 개혁이 시급하다는 얘기다.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에 쉽지는 않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 한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