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쿠오바디스와 행로난](24) ‘빈익빈 부익부’에 사라진 정의-안재원(경향신문 20161223)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7.01.04 15:12 조회 135

[쿠오바디스와 행로난](24) ‘빈익빈 부익부’에 사라진 정의…평화가 죽자 로마도 무너졌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ㆍ로마 공화정은 왜 몰락했을까
프랑수와 토피노-레브룬의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1792). 동생 그라쿠스는 형의 뒤를 이어 개혁법안을 추진하다가 보수파에 의해 살해됐고, 결국 로마 공화정은 붕괴했다.
프랑수와 토피노-레브룬의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죽음’(1792). 동생 그라쿠스는 형의 뒤를 이어 개혁법안을 추진하다가 보수파에 의해 살해됐고, 결국 로마 공화정은 붕괴했다.
로마 공화국 몰락의 원인은 무엇일까? 베르길리우스(Vergilius, 기원전 70~19)의 생각이다.
“바로 옆에/ 타르타로스의 자리와 지하세계로 향하는 문을 깊게 새겼는데/ 흉악한 자들을 처벌하는 장면과, 카틸리나여,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려서 복수의 여신들의 얼굴을 보며 떨고 있는 너의 모습도/ 또한 한적한 곳에 있는 경건한 이들도, 이들에게 법을 전하는 카토도!”
장면은 기원전 63년에서 기원전 46년 사이에 벌어진 사태를 담고 있다. 사태는 로마 공화국의 몰락을 가리킨다. 기원전 63년은 키케로가 집정관으로 재직하던 때였다. 때는 바야흐로 원로원 중심의 귀족 파당과 평민 중심의 파당이 로마의 경제개혁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시절이었다. 평민파의 수장인 카틸리나는 귀족 중심의 원로원의 이익을 대변하던 키케로의 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했다. 카틸리나 시각에서 보면 혁명이지만 키케로 눈에는 내란을 도모한 음모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발각된다. 베르길리우스는 카틸리나를 지하세계에서 처절하게 응징당하는 모습으로 새기고 있다. 이 사태에 대해서 베르길리우스는 매우 단호하다. 철저히 원로원 중심의 귀족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길리우스에 따르면, 카틸리나야말로 공화국을 파멸로 이끈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카틸리나의 개혁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많다. 예컨대 로마의 역사가 살루스티우스(Salustius, 기원전 86~34)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살루스티우스는 로마 공화국 위기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이다. 로마를 위기로 몰고 간 근본 원인을 경제의 실패에서 찾는데, 그 원인이 공정과 정의의 상실에 있다는 것이 살루스티우스의 입장이다. 로마 공화국의 위기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해 줄 참고인을 한 명 부르겠다. 
“사실 독자들은 새로운 사태의 원인에 대해서 더 듣고자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토록 맹위를 떨쳤던 인민의 힘이 자체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정점을 돌아서 스스로 쇠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말이다.”(리비우스, <로마 건국기> 서문 제4장)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Livius, 기원전 64~17)의 말이다. 그런데, 리비우스가 말하는 로마 최상의 정점은 언제일까? 기원전 146년이다. 로마의 전체 인민이 한마음(concordia)으로 합심해서 약 120년에 걸쳐 벌인 사투 끝에 카르타고 군대를 물리친 때가 그해였다. 로마의 힘이 최정상에 도달했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바로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외부의 적과 싸울 때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다투는 마음(discordia)”이 로마 인민의 심장을 갈라놓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해였다.
전후(戰後) 사정은 이러했다. 마침내 지중해의 지배자로 등극하게 된 로마에는 카르타고를 포함한 인근의 나라로부터 받아 낸 전쟁 배상금, 전리품, 전쟁 노예들이 대량으로 유입된다. 소위 “전쟁 특수 호황”을 누리게 되는데, 이를 등에 업고 전에 없던 탐욕과 사치 풍조가 로마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된다. 한편 로마에 요즘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경영혁신”이 도입된 것도 이 시기다.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라 불리는 토지 경영 방식이 그것이다.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점령했던 국유지들이 소수 귀족의 사유지로 전환된다. 불법이었다. 어쨌든, 이는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대토지 사유제로 확장하게 된다. 소수의 귀족 중심의 대토지 사유제는 한편으로 자영농민(colonus)을 빈농으로, 빈농을 다시 도시 빈민으로 내몬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에서 포획된 노예들이 대토지 경작에 투입된다. 이것이 명실상부한 토지경영 기법이었다. 이와 같은 노예 노동에 기반을 둔 대토지 경영방식의 확산으로 로마는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사회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도시 빈민으로 몰락한 자영농민의 실업과 구제 불능의 빈곤이 바로 그것이었다. 토지를 상실한 자영농민들의 유입으로, 당시 로마 인구를 혹자는 50만, 혹자는 200만에 육박했다고 추정하는데, 로마 시민들 대부분이 경제 기반을 상실한 이른바 ‘흙수저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한마디로, 로마식 양극화 현상에 의한 사회적인 부작용이 곳곳에서 목도되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집세와 집값의 폭등이었다. 엎친 데 덮치기로 곡물 부족이 이어졌고 곡물 가격이 폭등했다.
‘토지공개념’에 근거한 개혁 프로그램인 농지분배법을 추진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토지공개념’에 근거한 개혁 프로그램인 농지분배법을 추진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소위 ‘헬로마’(hell-Roma)의 구원투수로 자처한 이가 등장하는데,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 기원전 162~133)였다. 그가 내건 개혁 프로그램은 농지분배법안(lex agraria)으로 핵심은 토지공개념(ager publicus)이었다. 토지 소유에 상한선을 두고, 불법으로 차지한 대지주 토지의 경우 일정 정도의 보상을 해 주고 국가로 환수하여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에게 분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법안을 제출하면서 그라쿠스가 민회에서 행한 연설이다. 
평민회의에서 연설 중인 가이우스 그라쿠스.
평민회의에서 연설 중인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탈리아의 들과 산을 떠도는 야생 짐승들도 각자 돌아갈 보금자리와 숨을 굴이 있소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사람들에게는 다른 어느 것도 주어진 게 없소. 그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공기와 햇빛뿐이오. (…) 그들은 결국 귀족의 부와 사치를 위해 싸우다 죽을 뿐이오. 그들은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들은 손에 한 줌의 흙도 쥐지 못했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편 제9장) 
연설은 감동적이었고 법안도 통과되었다. 하지만 법안의 통과로 로마는 본격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선점했던 공유지(ager publicus)를 몰수당하게 된 대지주 중심의 귀족 세력과 농지법의 시혜를 받게 된 평민 세력으로 나뉜다. 원로원도 보수와 개혁의 양 진영으로 분열된다. 이 분열을 혹자는 “두 마음”(discordia)이라 부른다. 아무튼 귀족 세력과 평민 세력 사이에 형성된 긴장은 기원전 133년 7월에 실시된 호민관 선거에서 폭발한다. 개혁 프로그램의 지속을 위해서 그라쿠스는 연임 금지의 관례를 어기고 호민관직에 입후보한다. 이를 빌미 삼아 보수파는 카피톨리움 언덕의 제우스 신전에서 돌과 몽둥이로 그라쿠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로마의 사회개혁 시도는 일단락을 맺는다. 그러나 개혁 실패의 여파는 컸다. 로마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든다. 근본적으로 사회의 양극화로 말미암아 국가-공동체를 통합하고 화합으로 이끄는 힘들인 정의와 공정의 원리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된다. 정의의 죽음은 평화의 죽음으로 직결되었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개혁 실패 이후 약 100여년에 걸쳐서 로마는 내전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내전의 결과는 공화국의 몰락이었다. 베르길리우스의 말 가운데에서, 기원전 46년에 죽은 카토가 몰락한 공화국의 지하세계에서 ‘법’을 전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여기까지가 로마 공화국의 몰락 원인에 대한 이야기다. 주목해야 할 점은 공화국은 몰락했지만 로마는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구원투수가 등장하는데, 바로 아우구스투스다. 다시, 베르길리우스의 말이다. 
“여기에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인들을 독전하는 카이사르가/ 원로원 의원들과 인민들과 함께, 조상신들과 위대한 신들과 함께/ 높이 솟은 뱃고물에 우뚝 서 있도다. 그의 이마에는 두 줄기의/ 광채가 품어져 나왔고, 정수리에는 아버지의 별이 맴돌았도다./ (…) / 맞은편에는 야만의 전리품과 다양한 무구와 함께 안토니우스가/ 인디아의 해안가와 동방의 나라들로부터 개선하는 승리자의 모습이/ 이집트와 동방의 군인들과 멀리는 박트리아의 용사들이 전열을 함께 짜고 있도다.”
내전의 종결자로 아우구스투스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장면에는 두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한데, 베르길리우스의 묘사는 누가 봐도 편파적이다. 한쪽은 정의를 수호하는 선의 축인 반면, 다른 한쪽은 불의를 숭상하는 악의 축으로 몰고 있기에. 한쪽은 문명 세력으로, 다른 한쪽은 야만 세력이라고 한다. 이런 배치를 하면서 베르길리우스는 “전쟁과 평화”, “선과 악”,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을 전략적으로 구사한다. 이는 그가 로마 공화국의 문제를 지적할 때에 사용하지 않았던 이분법이다. 참고로, 규모에 있어서 도시 국가인 로마 공화국의 정치 문제를 다루면서 베르길리우스가 애용했던 이분법은 “정의와 불의”, “신의와 배신”, “자유와 억압”, “불화와 화합” 등의 개념 대립이었다.
도대체, 베르길리우스가 이처럼 표현 전략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로마가 제국의 성립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규모에 있어서 도시 국가 단계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와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에 요청되는 기준과 규범들과 제국 단계에 들어선 로마가 감당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처리할 때에 요구되는 기준과 가치들의 비교를 통해서 제국의 성립이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도시 국가 로마의 근간을 구성했던 기준과 덕목들로는 이미 규모에 있어서 그리고 실질적으로 지중해 지역의 거의 모든 나라와 종족을 포괄하면서 그들을 통치해야 하는 위치로 성장해버린 로마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의 전환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는 셈인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베르길리우스는 “전쟁과 평화”, “선과 악”, “문명과 야만” 등과 같은 개념들로 정치의 프레임을 짠다. 이것들이 규모에 있어서 제국의 상태로 성장해버린 로마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라는 것이다. 국가 규모의 변화에 따라 국가에 부여되는 당면 과제들도 다르고, 그 규모에 적합한 통치 체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통치와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통해서 로마의 제국을 정당화한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의 제국 통치에 요청되는 설득의 근거를 제공한다. 규모의 정치 논리를 이용해서 제국 로마를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표현 전략을 통해서 로마는 정의, 선, 문명의 수호자로 거듭나고, 아우구스투스는 천상의 위임을 받은 로마 인민의 제일 시민(princeps)이 아닌 황제(Caesar)로 등극한다. “그의 이마에는 두 줄기의 광채가 품어져 나왔고, 정수리에는 아버지의 별이 맴돌았다”고 한다.

■무한 제국 로마! 
2000년 세월이 흘렀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로마제국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당시에도 논란이 작지 않았다. 실은 베르길리우스 자신도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기에. 로마제국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소개하겠다. 이 글은 밝은 면만 소개하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로마가 세계 역사에 남긴 유산이 작지 않기에. 증인은 제우스다. 
“두려워 마라, 베누스여, 네 백성의 운명은 확고하다. (…)/ 백성들은 로물루스의 이름에서 자신들을 로마인이라 부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주지 않았다./ 나는 무한 제국을 주었다. (…)/ 이것이 나의 뜻이다.”(<아이네이스> 제1권 257~283행)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을까? 답은 양가적이다. 먼저 “아니요”에 대해 해명하겠다. 역사적 실체로서 로마는 사라졌다. 이 점에서 제우스의 뜻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면 “예”에 대해서 해명하겠다. 로마의 “무한 제국”은 문명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서구 역사에서, 로마는 제국 단계에 이르는 규모로 힘과 크기가 성장한 나라에서는 어김없이 되살아난다. 세계를 지배하고 통치해 본 경험이 이전 자신들의 종족 역사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는 일정 정도 이상의 규모로 커진 국가의 역사에는 항상 반복되어 나타난다. 로마는 지금도 살아 있는 제국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게임의 기본 판과 그 판의 규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배워야 할 것 가운데에 하나가 로마제국의 역사일 것이다. 
로마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미국이 현대의 로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로마가 단적으로 한반도의 문제와 관련해서 펼치는 전략·전술이 어떤 원리에 입각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과 관련해서 고대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때 사용하던 전략·전술에 대한 이해도 매우 중요한 참조 사례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중국이다. 중국의 공산당 통치 체제가 로마 원로원의 그것과 구조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주국의 학자들도 로마 원로원의 역사를 매우 심도 깊게 연구한다고 한다. 사실 일당 중심의 통치 제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소수의 원로들이 막후에서 최고 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고대 로마의 원로원 정치와 중국의 현대 공산당의 통치 방식이 거의 유사하다.
 
“무한 제국”에 대한 제우스의 뜻은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묻자. 과연 우리가 세계를 움직이고 운영해 보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말이다. 만약 없다면, 적어도 이런 역사를 가진 문명을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열강들의 전략·전술이 로마의 그것에 뿌리를 두고 응용·변용되고 있다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다 좋다. 며칠 전에 광화문에서 광장에서 들었다. 그런데, “이게 나라냐”고.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2231917005&code=960205#csidx4ffa7a7dcb57838ad01b40b3a29158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