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쿠오바디스와 행로난](32) 출판업자 알두스-안재원(경향신문 20170303)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7.03.08 09:53 조회 90

[쿠오바디스와 행로난](32) 출판업자 알두스, 서양 정신의 ‘신대륙’을 마련하다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ㆍ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
뉴욕 공공도서관이 소장 중인 구텐베르크 성경. 위키피디아
뉴욕 공공도서관이 소장 중인 구텐베르크 성경. 위키피디아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로마 말이다. 원래는 그리스 속담(speude bradeos)이다. 이를 로마 격언으로 만들어 유포한 이는 로마의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Augustus·제위 기원전 27년~서기 14년)다. 그의 전기를 지은 수에토니우스(Suetonius·서기 70~120년)의 보고이다.
제정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천천히 서둘러라”고 말했다고 한다.중요한 일을 확실히 하라는 뜻일 것이다.
제정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천천히 서둘러라”고 말했다고 한다.중요한 일을 확실히 하라는 뜻일 것이다.
“장군(혹은 지도자)이 지녀서는 안되는 악덕이 두 가지가 있다. 성급함과 무분별함이 그것들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큰소리로 ‘천천히 서둘러라, 용맹한 장군보다 침착한 장군이 더 낫다’고 외치곤 했다고 한다. (…) 그는 소탐대실의 잘못을 범하는 사람을 ‘황금 바늘로 낚시하는 어부’에 비유했다. 줄이 끊기어 황금 바늘을 잃을 경우 어떤 고기를 잡더라도 보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수에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편 제25장, 4절) 
천천히 서둘러라! 정신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이 있었다. 장군은 아니었다. 조그만 출판사의 사장이었다. 이름은 알두스(Aldus·1452~1516)였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페라라에서 과외선생으로 연명하다가 교육자에서 출판업자로 인생 항로를 바꾼다. 1489년의 일이다. 출판의 꿈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위해서 알두스는 당시 상업의 중심지인 베니스로 간다. 그곳에서 향료업으로 큰 부를 쌓은 토렌사노의 딸과 결혼한다. 장인은 사위의 출판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그 덕분에 세워진 회사가 알두스 출판사다. 1493년의 일이다. 이때 그가 내건 기치가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였다.
알두스 출판사의 로고
알두스 출판사의 로고
시작은 더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출판 사업의 선구자인 구텐베르크(Gutenberg·1398~1468)가 들어야 했던 비난과 사업 실패의 원인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이동 활자의 개발에 성공한 구텐베르크는 <성경>의 출판에 손을 댄다. 당연히 대박을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비난뿐이었다. 출판본의 오류 탓이었다. 필사의 경우 한 번의 실수로 한 개의 오류가 생겨나지만, 인쇄는 한 번의 실수로 3000개의 오류가 자동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업은 실패한다. 돌아온 것은 빚뿐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실패 원인을 분석한 알두스는 문헌의 편집과 교정을 전문가에게 의뢰한다. 이는 일종의 책임-편집 제도인데 이를 통해서 가능한 한 오류를 줄인다. 이렇게 철저한 검증과 교정을 통해서 출판된 책들이 독자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편집 제도의 도입을 통해서 알두스 출판사는 오류 때문에 들어야만 했던 당대 지식인들, 특히 가톨릭 신부들의 비난과 오해를 극복할 수 있었다. 믿을 만한 책을 내기 위한 알두스의 열정(studium) 덕분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믿을 만한 책들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위해서, 즉 비판정본(editio critica) 만드는 방법을 체계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집에 학자들과 전문가들을 초대한다.
알두스가 개발한 이탤릭 글씨체로 인쇄된 단테의 <신곡> 서문.
알두스가 개발한 이탤릭 글씨체로 인쇄된 단테의 <신곡> 서문.
1500년의 일이다. 이렇게 모인 이들을 중심으로 고전연구회(sodalitas)까지 만든다. 이를테면 암스테르담의 에라스뮈스(Erasmus·1466~1536)와 프랑스 왕립학사인 기욤 뷔데(Bude·1468~1540)가 이 연구회의 주요 회원이었다. 뷔데는 소위 부엉이 로고의 출판사로 지금도 성업 중인 뷔데 출판사를 파리에 세운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알두스의 출판 사업은 소위 대박을 친다. 사실 여기에는 알두스의 사업 수단도 한몫 크게 거들었다. 사업은 열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못 보는 것을 읽어내는 예리한 관찰력과 남이 못하는 것을 실행에 옮길 줄 아는 과감한 실천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과감한 실천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책값의 인하였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 한 달 급료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요즘 시세에 비추어 보면 고가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저가였고, 일종의 박리다매 전략에 해당한다 하겠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알두스는 책의 제작비용을 낮추고 운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책의 크기를 줄였다. 누구나 호주머니에 책을 넣어 다니면서 책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문고본’은 이렇게 탄생했다. 사업도 대박을 쳤다. 사실 저가 정책은 아주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결단이었는데, 이것이 알두스가 출판 사업에 대박을 칠 수 있었던 여러 비결 가운데 하나였다.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주는 사례는 향료가 팔리는 곳이면 책도 팔릴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는 점이다. 당시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졸부 소리를 듣던 신흥 상업세력의 지적 욕구가 대단했다. 경제적 능력에 대비해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만이었기 때문이다. 알두스는 이러한 상업세력의 지적 욕구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고 이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방법이 책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돈을 호주머니에서 끌어내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던 알두스는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책의 형식도 상품이라는 전략을 취한다. 책의 디자인이 주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책을 사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어 버리자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 눈에 잘 들어오면서도 아름다운 글자체의 개발이었다. 이때 그가 개발한 글자체가 소위 이탤릭체이다.
물론, 책을 편하게 읽도록 도와주려는 목적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이 지갑을 열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인색하지 않다는 점을 간파한 알두스의 예리한 관찰력 덕분이었다. 물론 알두스가 최초의 출판업자는 아니었다. 최초의 출판업자는 독일인인 요하네스였다. 그가 출판사를 처음 차린 곳은 마인츠 지역의 스파이어라는 조그만 도시였다. 아울러 그리스어 인쇄 폰트를 처음 개발한 사람은 프랑스인 니콜라스 엔손(1402~1480)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알두스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고, 시대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갔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소위 ‘블루오션’ 이론을 입증한 최초의 사업가가 알두스였다. 그가 사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는 데에는 그의 사업가적 기질과 능력이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하겠다.
하지만 그가 거둔 성공의 밑바탕에는 사업가의 능력 이외에 더 근본적이고, 더 결정적인 원동력이 따로 있었다. 사랑이었다. 인문학(studia humanitatis), 책(philobiblia), 고전에 대한 사랑(philologia)이었다. 사업적으로 그가 아무리 수완이 뛰어난 사업가라 할지라도, 그가 아무리 큰 재력가라 할지라도, 책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토록 뛰어난 학자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그렇다. 아무튼, 시작은 더뎠다. 하지만 작업은 철저했다. 책들도 ‘천천히’ 출판되었다.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키케로, 세네카 등등이 말이다. 이때 출판된 책들은 서양 고전 원전의 초판본(editio princeps)들이다. 지금도 개정 편집본의 주요 저본(底本)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양 정신의 ‘새로운 대륙(terra incognita)’은 이와 같은 “천천히 서두르는” 원칙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알두스가 천천히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한국인문대전(韓國人文大典)>!” 김월회의 제안이다. 2017년 2월2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것이다. 동의한다. 그런데, “천천히 서두르자”는 말을 감히 덧붙이지는 못하겠다. 이유인즉, 단적으로 우리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4차 산업혁명’을 외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의 미래가 거기에 달려 있다고들 한다. 과연 그럴까. 내 생각은 이렇다. 소위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우리가 주도한다 할지라도, 과연 그럴 수 있을지도 실은 의심스럽지만, 그것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할 것이다. 정신의 성숙이 동반되지 않은 물질적 성장이 초래한 피해와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기에. 물적 성장이 초래한 증거들로 ‘엑스포’를 열 수 있는 나라가 소위 ‘헬조선’일 것이다. 단언컨대, 4차 산업혁명은 단지 기술과 정보의 발전과 개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인문의 상상력과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할 때에 4차 산업혁명은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월회의 <한국인문대전>에 대한 제언은 시의적절하고 의미 있는 선언이다. 왜일까. 우리의 사정이 다급해서다. 그 다급함을 잘 보여주는 실례가 김월회가 지난 글에서 언급한 유장(儒藏) 사업이다. 베이징대학 ‘유장’센터 홈페이지에 걸린 소개글이다. 

“<유장>을 편찬하려는 목적은 도장, 불장(佛藏)을 편찬한 목적과 마찬가지로 유가 여러 학파의 전적과 문헌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를 후세 사람들이 보존하고 이용하도록 하는 데 있다. (…) 중국 역사상 중요한 유가 전적 문헌을 수록하여 2022년에 완성할 계획이다. 선행으로 편찬되는 <유장> ‘정화편’은 중국 경사자집 사부(四部)의 책들과 출토 문헌 가운데에서 학술사상사에서 대표적인 유가 전적과 문헌 461종을 수록하여 281책으로 쪼개어 편찬한다. 또한 한국, 일본, 베트남 역사에서 한문으로 저술되었던 중요한 유가 저작 100종도 골라 수록하여 40책으로 쪼개어 편찬한다. 이 편찬물은 모두 321책으로 2억자 이상이며, 2022년에 완성될 계획이다.” 

이런 사업은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어도 문헌이 없으면 할 수 없고 당장 눈앞에 수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에. 사업에 대한 국가적 합의와 동의를 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대규모 연구 편찬 사업은 소위 “해 본 나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연구 사업이 가져다 주는 의미와 효과를 맛보고 경험해 본 나라만이 할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것이 소위 ‘고급 정치(politica classica)’다. 이와 관련해서, 중국이 소위 “해 본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나라 시대에 유교 경전과 문자 체계인 한자(漢字)를, 당나라 시대에 불경을, 송나라 시대에 경전의 주해와 해석을, 원나라 시대에도 서양과 아랍의 외국 문헌들을, 명나라 시대에도 <영락대전(永樂大典)>을, 마지막으로 청나라 시대에는 고증학을 바탕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해 본 역사를 가진 나라이기에. 따라서, 지금 중국이 추진하는 ‘유장’ 사업이 우연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이 아닌 셈이다. 오랜 제국의 역사를 가진 중국이 이런 종류의 대규모 연구 사업이 제공하는 실익과 좋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나라임은 분명하다. 지금의 중국 정부도 당장 이 ‘실익’이 가깝게는 개별 해당 시기 왕조의 통치 기반을 마련해 왔다는 것, 저 ‘좋음’은 멀리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문명의 토대와 기반이 이 같은 문헌 정비 사업이라는 원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오랜 경험과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것이 ‘유장’ 사업을 추진하는 뒷심일 것이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이 사업은 상당 정도 진척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퇴계(退溪) 문집의 일부가 이미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고 한다. 물론, 우리 문헌이 중국에서 출판되었다는 것은 영광스럽고 경사스러운 일일 것이다. 믿을 만한 정본이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도 의미 있다. 좋다. 옛 문헌 혹은 옛 고전이 전적으로 한 민족의 혹은 한 국가만의 소유물은 아니기에.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요컨대, 단지 한자로 기록되었다 해서 16세기 조선에서 지어진 문헌이, 혹은, 그것의 사상적 기원이 중국에 있다 해서 예컨대 퇴계의 사상을 중국 문화의 학문 유산이라는 주장을 한다는 소문도 함께 접했기 때문이다. 국제 학계에서 중국의 위력과 위세가 커지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퇴계는 조선의 유학자라기보다는 ‘명유(明儒) 퇴계’로 통용될 날이 조만간 닥칠지도 모르겠다. 어느 지인에게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원효(元曉)도 ‘당승(唐僧) 원효’라고 불린다고. 어쨌든, 우리의 책들임에도 그 책들을 이제 중국에서 수입해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우(杞憂)이길 바라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우리의 역사가 다시 백년 전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르겠다. “한국, 일본, 베트남 역사에서 한문으로 저술되었던 중요한 유가 저작 100종도 골라 수록하여, 40책으로 쪼개어 편찬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책들도 족히 30종이 넘는다고 한다. 내로라하는 조선 유자들의 책들을 앞으로는 중국에서 수입해야 할 것이다. 
 
한데, 책만 수입해다 보는 것에 그칠까. 더 나아가 해석의 방식과 관점도 수입할 날이 머지않을 것이다. 중국의 ‘유장’ 사업이 무서운 이유가 실은 여기에 있다. 동북공정보다 더 무서운 것이 ‘유장’ 사업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사정이 결코 한가하지는 않다는 얘기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나, 잠깐! 책을 만드는 데에 “천천히 서둘러라”의 원칙은 유효하다. 고증과 검증을 거칠 때에 믿을 만한 책이 될 수 있고, 또한 여기에 상품이 아닌 작품이 될 때에 사람들의 지갑은 열리기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3032114005&code=960205#csidxe88d3aad68fad3bb01407c10dc28f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