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쿠오바디스와 행로난](36) 공동의 것은 공동의 것-안재원(경향신문 20170407)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7.04.19 09:39 조회 31

[쿠오바디스와 행로난](36) ‘공동의 것은 공동의 것’…공화국의 원칙으로 내실을 다지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ㆍ악티움 해전과 로마제국의 비밀
요한 게오르그 플랏쳐(1704~1761)가 그린 ‘악티움 해전’.
요한 게오르그 플랏쳐(1704~1761)가 그린 ‘악티움 해전’.
기원전 31년에 벌어졌던 악티움(Actium) 해전을 승리로 이끈 아우구스투스의 개선식 장면이다.
“맞은편에 세 번의 개선 행진을 하며 로마에 입성하는 카이사르가, 그는 이탈리아를 보우하는 신들에게 바치는 불멸의 서원을 한다. 전 로마에 삼백의 거대한 신전을 봉헌하겠다고. 거리는 환호와 박수와 축제로 들끓어 오른다. (…) 제단에는 황소들이 희생되어 대지를 덮는다. 아우구스투스는 빛을 발하는 아폴로 신전의 하얀 입구에 자리한다. 인민이 바치는 제물을 골라 하늘로 치솟은 기둥에 봉헌한다. 패배한 족속의 백성들이 긴 행렬을 지어 들어온다. 말만큼이나 다양하다. 의복과 무구도 각양각색이다. 유목민 노마데스족과 (…) 활의 명수 겔로누스족을 불의 신은 섬세하게 새긴다. 유프라테스강이 잔잔한 물결로 흐르고, 저 대지의 끝에 거주하는 모리누스족과 두 개의 갈라진 하구를 향해 흘러가는 레누스강과 야생의 길들여지지 않은 다하이족과 다리를 못마땅해하는 아락세스강이 깊이 새겨진다.”(<아이네이스> 8.714~728) 
서기 1세기쯤 제작된 아우구스투스 상.
서기 1세기쯤 제작된 아우구스투스 상.
아우구스투스가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300개의 신전을 로마에 세우겠다고 한다. 로마인에게 3은 시간적으로 영원함을 상징한다. 실제로 300개의 신전을 짓지는 못했고, 82개의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거리는 승리의 환호와 축제의 환희로 가득 차 있다. 그 거리로 패배한 이민족들이 끌려온다.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서방을 가르는 라인강, 동방의 세계를 부드럽게 적시는 유프라테스강, 남방의 나일강, 북방의 아락세스강이 언급된다. 베르길리우스는 이런 표현 방식으로 지상의 동-서-남-북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로마를 위치시킨다. 베르길리우스의 묘사대로, 로마 제국은 이렇게 탄생했을까? 답은 양가적이다. 밖에서 보면 그렇고 안에서 보면 아니다. 밖에서 본 로마 제국의 모습이다. 악티움 해전이 절정에 도달했을 순간에 대한 베르길리우스의 묘사다.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악티움의 아폴로가 드디어 활시위를 아래로 겨누었다. 그러자 이집트인들, 인디아인들, 아랍인들, 사바이인들이 온통 겁에 질려 모두 등을 돌려 도망친다. (…) 맞은편에서 거대한 몸집의 나일강이 온몸으로 비통해하며 가슴을 열어 패배자들을 자신의 품속 깊은 곳에 숨기고 나서는 자신의 검푸른 옷으로 감추고 물길을 갈래갈래 갈라놓는다.”(<아이네이스> 8.703~713)
로마에 있는 아우구스투스 묘지.
로마에 있는 아우구스투스 묘지.
전세가 아폴로신의 등장으로 정오를 기점으로 급격히 로마 쪽으로 기울고, 로마의 눈에 야만 세력이었던 이집트, 인디아, 아랍, 예멘이, 곧 동방세계가 서방세계에 굴복하는 장면. 여러 말을 해야 하지만, 이 결전은 역사적으로 여러 의미를 지닌다. 이 결전을 기점으로 로마로 상징되는 서방세계가 이집트를 대표로 하는 동방세계에 승리했다는 점,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혈통적·상징적 계승자인 프톨레마이우스 왕조를 대신해서 서방세계의 대표자로 공히 로마가 우뚝 섰다는 점, 공화국 로마가 제국 로마로 전환되었다는 점, 결론적으로 로마 제국이 세계의 지배자로 올라섰다는 점 등이 그것들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세계에 평화의 법도를 수립하는 것이 로마의 천명(天命)이고, 로마를 선과 정의의 집행자이자, 곧 ‘세계의 통치자’로 부각시키는데, 눈이 부실 정도다. 
“기억하라! 로마인이여, 인민을 명령으로 다스리는 것을, (이것은 너희만의 기술이다!), 평화의 법도를 수립하는 것을, 순종하는 자에겐 관용을, 오만한 자들에겐 징벌을 내리는 것을!” (<아이네이스> 6.851~853) 

■ 아우구스투스는 김과장? 
안에서 본 로마의 실상은 한마디로 ‘속빈 강정’이었다. 200년 포에니 전쟁을 이긴 로마는 이중의 병마에 시달렸다.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정치적 병마는 기본적으로 정치 구조와 경제 구조의 불일치에서 기인했다. 보충하겠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승리한 이후에 지중해 세계의 패권 국가로 성장한 제국 로마의 경제 규모는 더 이상 도시국가의 그것이 아니었다. 균형과 견제의 원리를 기본 골격으로 삼는 로마 공화정의 정치 구조는 신속성과 포용성을 기본 덕목으로 삼는 제국의 경제 규모를 감당하기에 적합한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국가의 규모에 최적화된 정치체제인 공화정이라는 정치 구조와 제국의 경제 구조 사이에 있는 불일치로 인해 갈등과 다툼은 피할 수가 없었고, 내전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다. 다툼은 정치 구조와 경제 구조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물론 그 다툼의 상징적인 종결이 악티움 해전이었다.
그러나 경제 구조에 맞는 정치 구조로 정치체제를 전환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커질 대로 커져버린 대중의 욕망을 채워주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정권을 장악한 시기는 로마 대중의 욕망이 그야말로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올라 버린 때였다. 터지기 직전이었다. 사실 로마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와 같은 정치가들이었다. 이른바 ‘대중영합주의(populism)’에 부합하는 정책을 남발했던 이들이다. 한번 커진 대중의 욕망은 정치와 통치를 통해서 쉽게 제어되는 것이 아니다. 파국을 맛보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이 대중의 욕망이다. 이에 대한 증인이 투키디데스고 플라톤이다. 
아무튼, 아우구스투스에게 대중의 욕망과 기대를 채워주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군대를 이끌고 정복 전쟁에 나서는 것, 다른 하나는 살림을 잘하는 것이다. 즉 재정의 정비가 바로 후자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취한 방법은 정복 전쟁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동쪽 지역을, 카이사르는 지중해 서쪽 지역을 정복하고, 그곳에서 노략한 곡물과 재물을 로마에 가지고 들어왔고, 그것들로 대중의 배를 채워주고, 목욕탕을 지어 몸을 씻겨주고, 경기장을 지어 눈을 즐겁게 했다. 소위, “빵과 서커스”(유베날리스의 <풍자> 제10권 81행) 정책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정복 전쟁에 입각한 로마의 약탈 경제는 곧 자체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가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했던 기간이었다.
현실적으로도 로마가 군대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지역들 대부분은 이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 의해서 로마의 식민지로 편입된 상황이었다. 서쪽은 대서양이라는 바다가 경계였고, 동쪽은 군사적으로 결코 만만치 않았던 파르티아 제국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공화정 말기와 제국 초기에 로마는 파르티아와 벌인 전쟁에서 이겨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취할 수 있는 정책은 군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나라의 살림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최근 KBS에서 방영된 <김과장>과 유사한 방식의 재정정책을 시도한다. 그의 정책들 중에 세 개만 소개하겠다. 

■ 제국의 비밀 하나! 
먼저,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의 투명성을 높인다. 이를 위해 공공회계를 작성토록 명하는데, 수에토니우스의 보고다. 
“제국 전체의 명세장은 셋째 두루마리에 있다. 어느 부대에 얼마의 군인이, 국고와 금고에 있는 돈과 세금이 얼마인지 적혀 있다.”(<아우구스투스> 101.4) 
제국의 회계 보고는 원로원에 제출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또한 원로원 관할의 국고도 회계 기록에 남기도록 명한다. 이것이 제국 전체의 살림을 아우르는 책임자의 기본인데, 몸젠(Theodor Mommsen)은 “모든 로마인들에게 출납을 기록한 회계장부를 기록하는 것은 도덕적인 의무였다”고 전한다(<로마사> 3.92). 흥미로운 점은, 아우구스투스가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금융업에 종사한 기사 신분의 혈통이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돈의 흐름과 재정에 대해 밝을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다. 로마가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밀(arcana imperii) 하나가 여기에서 해명된다. 그것은 재정 투명성이었다. 

■ 제국의 비밀 둘! 
제국의 또 다른 비밀은, 아우구스투스가 재정을 먼저 확보한 이후에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정복 전쟁의 약탈 경제만으로는 그 해결이 불가능하다. 아우구스투스가 취한 정책은 군인금고를 만드는 것이었다.
“군사적인 것은 무엇이든 봉급과 보상의 정해진 형태로 고정했다. 등급에 따라 복무기간이나 소집해제에 따른 보상을 정했다. 나이와 가난으로 인해서 해제 후에 새로운 유혹(아마도 소요)에 동요되지 않도록 했다. 지속적으로 또한 용이하게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으로 군인금고를 만들었다.”(<아우구스투스> 49) 
아우구스투스의 재정정책이 어쩌면 맹자가 말한 “항산(恒産)”의 정치일 것이다. 문제는 재정의 확보일 것이다. 정복 전쟁을 벌이거나 세금을 징수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후자를 택한다. 사실 그는 뛰어난 장군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병약했다. 친히 전쟁터에 나선 적도 거의 없다. 반면 돈에 관한 머리는 명민했다. 정복 전쟁에 필요한 비용 계산을 그보다 빠르고 명확하게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뺏기 위해 들어가는 돈이 뺏어온 것보다 더 클 경우 원정을 승낙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점에서 아우구스투스야말로 경제를 아는 황제였던 셈이다. 재정의 확보를 위해 한편으로 그는 화폐를 통일하고 다른 한편으로 증세정책을 감행한다. 화폐의 통일로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관리했다. 이는 재정의 확보에 크게 기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노예 해방(5%), 노예 판매(4%), 매매품(1%), 각종 임대료 등도 증세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물론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해서 그가 머리를 짜내 만든 것이 상속세의 증세였다. 조세 저항이 따랐다. 가진 것이 많은 원로원 중심의 귀족들 반발이 특히 심했다. 
“거의 모든 원로원 의원은 5%의 상속세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반란의 조짐이 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의원들 스스로 다른 세원을 찾도록 했다. 이렇게 한 것은 세금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대안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자신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징세를 원로원 의원들이 승인토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사람들을 파견하여 개인들과 도시들의 재산을 등록시켰다. 이는 더 큰 손해를 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5% 상속세를 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일은 그렇게 되었다.”(디오의 <로마사> 56.28.4~6)
아우구스투스의 노회함은 파피우스법(lex Papia)의 입법 과정에서 절정을 보인다. 이 법은 상속자나 피상속자가 죽거나 자격을 상실할 경우에 상속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자는 내용을 담은 것인데, 이 법을 이용해서 부족한 재정을 메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정은 언제나 부족한 법이다. 이를 염려한 아우구스투스의 충고다. 
“공적인 것을 구분해서 실행할 수 있는 자들에게 공적인 것을 맡겨야 하고, 절대로 한 사람에게 넘기지 말라고 아우구스투스는 조언했다. 어떤 자도 참주가 되려는 야욕을 품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로 말미암아 공동의 것이 파괴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조언이었다. 현재 규모의 제국에 만족하고 더 확대시키지 말라는 조언도 했다. 제국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일이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잃어버릴 위험이 크기 때문이라 한다. 이 생각은 그의 말과 행동을 늘 모셨던 시종이었다.”(디오의 <로마사> 56.33) 

■ 제국의 비밀 셋! 
제국의 결정적인 비밀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공화국의 원리였다. 정치 구조에 있어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통치 방식으로 재정을 선택했다. 그러나 경제 구조에 있어서는 공화국의 원칙을 존수하고 부활시킨다. 아우구스투스가 펼친 재정정책의 뿌리가 실은 “공동의 것은 공동의 것”이라는 공화국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정치 구조와 경제 구조의 균형이 다시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 문제는 돈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뭐라 할까? “아직 멀었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까 싶다. 단적으로 ‘헬조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 구조와 정치 구조의 균형과 조화의 정립이 그야말로 시급한데,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사회적 동력과 이를 추동할 공적 리더십이 있는지도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도대체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취하지 않았던 대통령이 있다면, 과연 누굴까? 아니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도 못하는, 아니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통치자로 인한 혼란을 보면서 던지는 물음이다. 이런 마당에 재정의 확보 없이 공중을 날고 있는 ‘공약(空約)’들의 말잔치를 보면서, 아우구스투스가 보여준 일련의 재정정책에 참고할 만한 시사점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쩌면 말사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