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바티칸 조선 순교자 기록서 문명교차의 심연을 보다 / 한겨레 2012년 12월 11일자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3.02.07 15:35 조회 1,764

바티칸 ‘조선 순교자’ 기록서 문명교차의 심연을 보다

 


[한겨레] 안재원 교수 ‘한국의 성인들Ⅱ’ 출간

조선 후기 가톨릭의 전파와 이에 대한 박해는 이 땅에서 일어났던 가장 첨예한 문명 충돌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순교자들 가운데 103명은 1925년과 1968년 두 차례 시복식을 거쳐 1984년에 성인으로 추대됐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의 엄격하고 정밀한 시복·시성 절차를 고려하면 이런 의문이 들 법도 하다.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은 바티칸에도 남아 있지 않을까?

400여차례 증인진술집회 거친

성인 추대 103명 비밀보관문서

라틴어·프랑스어 필사본 편집 


문헌학자인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인문한국(HK)연구교수가 최근 이탈리아에서 <한국의 성인들Ⅱ>(Hagiographica Coreana·사진)란 책을 펴냈다. 바티칸의 비밀문서보관소에 있는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라틴어·프랑스어 필사본 문헌자료 가운데 일부를 ‘비판적 편집’으로 엮은 결과물이다. 지난 10일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세미나실에서 만난 안 교수는 “당시 첨예한 문명의 충돌 현장을 담고 있는 ‘원천자료’”라며 “중국·일본과 다른 한국의 특수한 정체성의 형성과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종합적인 텍스트”라고 이 문헌을 소개했다.

바티칸 문서고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조선 순교자 문헌자료는 전체 6권, A4 용지 크기의 종이 5700여쪽에 이른다고 한다. 두 권은 1839~1846년 박해 기간 순교자 82명에 대한 기록이고, 나머지는 1866~1867년 순교한 24명에 대한 기록이다. 이 자료는 1882년부터 1925년까지 400여 차례에 이르는 ‘증인진술집회’(sessio)를 거치며 만들어졌다. 순교자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증인들로부터 48가지 질문 항목에 따라 진술을 받고, 교황청에 보고하기 위해 그 내용을 서구 중세 때부터 개발된 엄밀한 공증형식에 맞춰 기록한 것이다. 모두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쓰인 필사본이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이 문헌자료를 발견한 이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문헌학자 이득수(1938~2004) 교수다. 시에나대학에 재직하던 이 교수는 1999년 바티칸 문서고 자료를 열람하면서 이 자료의 존재를 알렸으나, 2004년 간암으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 뒤 2007년, 이 교수가 시에나대학에 설립한 ‘한국·이탈리아 비교문학연구소’(현재 명칭은 ‘이득수연구소’)의 현지 학자들이 첫 편집본인 <한국의 성인들Ⅰ>을 펴냈으나, 결국은 “이 교수의 조언으로 문헌학의 길에 들어섰다”는 안 교수가 고인의 평생 과업을 이어받게 됐다.

“당시 순교자들 기적체험 없이


교리를 ‘말과 논리’로 수용

유학과 그리스도교 세계관 섞여”


이 곡절 많은 자료들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 안 교수는 “당시 가톨릭 신앙을 따랐던 민중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초기 가톨릭 신자들은 정약종과 그 아들 정하상 같은 지식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바느질장이·두부장사·도공 같은 하층 상공인들이었다. 증인으로 등장한 ‘덕이’ ‘절벽이’ 같은 당시 평범한 민중의 진술을 통해 이들이 누구인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왜 가톨릭 신앙에 몸을 맡겼는지, 서로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정순왕후의 상궁으로 순교한 박 루치아, 젊은 여성 순교자였던 권 아가사, 첫 순교자 윤지충을 마지못해 처형한 뒤 내뱉은 정조의 탄식 등 순교자들의 행적과 당시 이들을 둘러싼 상황들이 서술될 뿐 아니라 이들의 행적을 증언하는 민중들이 스스로의 삶을 말한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문헌 자료에 있는 교인들의 증언 속에서 시복·시성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여겨지는 ‘기적 체험’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으며, 교리 자체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고 믿음의 길로 나아간 모습이 도드라진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우리나라 민중들은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겪지 않았더라도, 가톨릭 교리 자체를 ‘말과 논리’에 입각해 옳다고 판단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느 교인이 자신을 심문하는 관리와 옳고 그름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대목도 나온다고 한다.

“서양의 ‘물질 문명’을 먼저 받아들인 이웃나라들과 달리 우리는 서양의 ‘정신’을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기독교·민주주의 전통이 유난히 강한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이 형성하고 발달해온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자료를 통해 자생적인 한국 근대화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는 풀이다. 또 ‘말과 논리’에 입각해 ‘정신’을 먼저 받아들였던 이유로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달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이에 더해 유학적 세계관과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만나는 첨예한 현장이 서구 언어로 기록됐다는 맥락 또한 “그 자체로 ‘문명의 교차’를 보여주는 귀중한 원천 자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는 이미 한문으로 된 관청의 문초기록 등 당시 기록을 갖고 있는데, 민중의 구술을 서구 언어로 직접 옮긴 이 자료를 통해 “처음 중국을 통하지 않고 세계사에 편입되는 과정의 큰 맥락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적혀 있기 때문에 19세기 서울 지역 우리말이 실제로 어떻게 발음됐는지에 대한 고증, 지명과 인명에 대한 확인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는 게 그의 평가다.

“서양에 녹아 있는 동양 정신의 흔적, 동양에 스며든 서양 정신의 흔적 등 문명이 끊임없이 주고받았던 교류를 문헌으로서 확인하고, 문명에 대해 굳어져버린 선입관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내 작업의 큰 목표입니다. 바티칸 문헌은 이런 작업에 아주 중요한 출발점이 되지요.” 

이번에 출간한 책은 전체 문헌의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 2017년까지 모든 문헌에 대한 비판적 편집을 끝내는 것이 안 교수의 1차 목표다. 그는 “비판적 편집본이 확정되면, 한문 문헌과의 정밀한 비교 분석, 국어학적 측면에서의 재검토 및 동서양 사상·종교·철학의 비교 등 무궁무진한 후속 연구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글·사진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