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고전에서 찾은 창의성·꿈을 찍어요” 영화 만드는 청소년들(경향신문-20120916)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7.16 09:21 조회 1,349
 
“고전에서 찾은 창의성·꿈을 찍어요” 영화 만드는 청소년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입력 : 2012-09-16 21:45:20
 
ㆍ교수·감독 재능기부 받아 ‘죄와 벌’ 등 단편 제작

10대 청소년들이 <죄와 벌>과 <베니스의 상인>을 단편영화로 만든다. 지난 4월부터 서울 관악구 내 학교에 다니는 27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서양 고전문학을 읽고 현실에 맞게 각색해 영화로 만드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할 엄두를 못냈던 저소득층 학생들도 포함돼 있다.

일주일 전 두 팀으로 나눠 시나리오를 각색했다. 가수 꿈을 반대하는 부모와의 갈등을 다루는 현대판 <죄와 벌>, 전교 1·2등을 놓고 경쟁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현대판 <베니스의 상인>. 요즘 청소년들의 고민이 그대로 묻어난다.

연출, 조연출, 촬영, 조명, 녹음 등으로 역할을 나눠 맡은 아이들은 15일과 16일에 현장 촬영을 진행했다. <베니스의 상인> 감독을 맡은 정채린양(18)이 “액션!”을 외치면 스태프는 모두 숨죽인 채 친구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집중하다 정양이 다시 “컷!”이라고 소리치자 그제서야 몸을 풀었다. 익숙하지 않은 서양 고전문학을 읽는 게 힘에 부치고 영화를 만들면서 멤버 간에 의견이 부딪치기도 하지만 참가한 청소년들은 “즐겁다”고 입을 모은다.

16일 서울 관악구청 별관에서 중·고교생들이 자신들이 읽은 고전 <죄와 벌> <베니스의 상인>을 영화로 만드는 작업 도중 한데 모여 환하게 웃고 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라디오 PD가 꿈이라는 박여경양(16)은 여기서도 <베니스의 상인> 녹음을 맡았다. 박양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기대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우울했는데 읽어본 적 없던 작품들을 또래들과 같이 읽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다”며 훗날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정채린양은 “고전을 함께 읽으니 혼자 읽을 때 못 본 것들을 볼 수 있었다”며 “직접 줄거리를 만들고 이틀 밤을 새워 콘티를 짜면서 영화에 들어가는 장치들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죄와 벌>팀의 촬영감독을 맡은 임주향양(17)은 “만화로만 봤던 서양 고전문학들을 원본으로 본 건 여기서가 처음”이라면서 “고전 속 주인공들의 스토리나 심리표현이 정말 재밌었다”고 말했다. 임양은 또 “서양 고전문학과 우리나라 고전의 스토리가 유사한 것을 보니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번 작업에는 교수·영화감독들도 동참했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교수(44), 권오숙 한국외대 영어과 교수 등은 고전을 접해보지 않은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맡았다. 영화 <역전의 명수>의 박흥식 감독, 단편영화 <우리학교 대표>의 박상준 감독은 영화 촬영을 직접 지도했다. 처음 이 작업을 구상한 건 사회적기업 ‘사람과이야기’의 허경진 대표(49)다. 박흥식·박상준 감독, 배우 윤동환씨와 함께 3년 전부터 서양 고전독서 모임을 해왔던 허 대표는 자라나는 아이들도 고전문학을 접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한국 청소년들이 입시경쟁에 매몰돼 교과서 밖에 나오는 고전문학은 접할 기회 자체가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교수들을 직접 섭외하고 관악구청과 협의해 지원도 받았다. 허 대표는 “성적이 안 오른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가족이 입시에만 매달리는 건 가정파괴”라며 “꼭 콘텐츠 창작자가 되지 않더라도 고전은 아이들 미래를 위한 토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흥식 감독(50)은 “고전에는 이야기의 원형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최신 드라마의 스토리는 이미 다 고전에 나와 있는 것이 많다”며 “영화는 반복되는 고전 속 스토리를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요즘 부모들은 책 읽는 아이에게 ‘책 읽지 말고 공부하라’고 말한다”며 “내가 고전을 통해 힘을 얻고 강해진 만큼 아이들도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로마 고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강의한 안재원 교수는 “현재 교육은 얼마나 알고 있느냐를 확인하면서 정답을 맞히라고 강요하는 이해의 인문학”이라며 “이젠 아이들이 자기만의 얘기를 하는 표현의 인문학으로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작품은 편집, 믹싱 등 후반 작업을 거쳐 다음달 12일 관악구청에서 상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