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일본은 어떻게 서양 근대해부학을 발견했을까(교수신문-20141007)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2.27 12:25 조회 1,543
       
일본은 어떻게 서양 근대해부학을 발견했을까?
화제의 책_ 『해체신서』 스기타 겐파쿠 외 지음|김성수 옮김|한길사|436쪽|25,000원
2014년 10월 07일 (화) 10:33:57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해체신서』를 번역·간행하기 직전인 1773년 스키타 겐파쿠와 나카가와 준안이 간행한 간략한 해부서로 해부도 세 쪽과 해설 두 쪽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표지에는 『해체신서』가 다섯 권으로 간행될 예정임을 밝히고 있다.  
 
일본이 ‘탈아입구’의 방편으로 선택한 것 가운데 ‘번역’이 있다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다. 또한 일본 근대화의 한 가운데 ‘蘭學’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이 책 『解體新書』가 놓이는 곳이다.

『해체신서』는 원래 독일의 쿨무스(1685~1745)가 1722년 펴낸 『해부도표(Anatomische Tabellen)』의 네덜란드어 출판본을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등이 일본어(한문)로 다시 번역해 1774년에 출간한 해부서다. 쿨무스의 책은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출간됐는데, 설명과 도판이 해부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집약적으로 배치됐기 때문에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김성수 서울대 교수(한국의학사)에 의하면, 『해체신서』의 번역, 출간을 계기로 서양 근대 해부학이 동아시아에 널리 소개됐을 뿐 아니라, 특히 일본으로서는 번역을 통해 서양의 학문을 대규모로 받아들이는 한 시대의 문화적 태도, 즉 난학이라 불리는 학문적 풍토가 다져지게 됐다.

중세적 동아시아 세계관과 지식체계 그리고 의학사상을 바꿔놓는 계기를 마련한 『해체신서』의 편찬은 어떤 의미일까. 옮긴이 김성수 교수는 “『해체신서』의 편찬은 의서를 번역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동서 문명의 교류와 접합의 상징이 됐으며, 일본이 서양학문을 수용하고 근대화를 하기 위한 노력의 시발점”으로 평가한다. 의학서 번역이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문화적·지성사적 맥락에서의 ‘번역’ 행위의 문제라는 중층적 시선이 이 책에 포개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중후반 일본 나가사키의 작은 섬인 데지마(出島)에서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서양의 지식, 특히 그 가운데서도 해부학과 동양인이 접촉하면서 『해체신서』가 간행된 것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당시 일본의 의학사적 배경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일로 이해할 수 있다. 1653년 막부는 외국선의 입항과 무역을 네덜란드와 중국으로 한정해 쇄국정책을 추진했는데, 데지마에 商館이 세워지면서 네덜란드와의 통상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때 이곳에 머문 네덜란드 의사의 통역을 담당했던 통사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이 요시오 고규였다. 『해체신서』의 ‘서문’을 쓰기도 한 그는 데지마의 상관에서 외과학·뇌과학·진단·치료술을 배웠다. 무엇보다 그는 『해체신서』의 편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마에노 료타쿠에게 네덜란드어를 교육하고, 에도 중기의 瘍醫(전근대 일본에서 외과를 부르던 명칭)로 오바마(小浜)의 藩醫였던 겐파쿠에게 의학지식을 전달함으로써 네덜란드 의학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수용되는 바탕을 마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KOARA(keiO Associated Repository of Academic resources)  
 

세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료타쿠만이 네덜란드어를 알고 있었던 까닭에, 번역의 중추는 료타쿠가 맡았다. 하지만 료타쿠도 40세가 넘어서야 네덜란드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당시 제대로 된 문법책이나 사전도 없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료타쿠의 네덜란드어 지식으로 책을 번역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부도에 표시된 기호를 단서로 삼아 인체 기관에 해당하는 명사를 번역해냈지만, 나머지 부분의 번역은 여전히 난제였다. 난관으로 가득했던 2년여의 번역 작업 끝에 1773년 『解體約圖』를 먼저 출판했다. 이후 1년 동안 다른 여러 해부서를 비교 검토해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수정한 뒤 이듬해인 1774년에야 책이 나올 수 있었다.

『해체신서』의 번역을 계기로 18세기 중반 이후 일본에서는 과학으로서의 의학이 그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또한 서구도 대표되는 선진 학문이 매우 빠른 속도로 유입됐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을 번역하면서 의학용어가 정립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김성수 교수는 이 대목에서 의미심장한 설명을 덧붙인다. “『해체신서』를 필두로 번역되기 시작한 많은 의학용어가 전통의 것 중에서 선택하거나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는 등 다양한 양상이 전개됐지만, 이후 서양의 의서를 계속 번역하는 과정에서 현대 의학용어로 자리잡게 됐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의 조선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18세기 후반에 태어나 19세기 전반부를 조선에서 살았던 李圭景(1788~?)은 전60권에 이르는 백과전서적인 『五洲衍文長箋散稿』를 저술한 지식인이다. 그는 인간의 몸, 신체의 형태와 기능 그리고 작동하는 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그는 성리학적 학문방법인 격물과 궁리의 시작은 天理가 아니라 내 몸이며, 거대담론보다 내 몸에 대해 우선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하늘이나 하늘의 법칙과 따로 떼어내 상정하지 않는 이상, 이것만으로는 근대적 학문방법과 통한다고 보기 어렵다.
옮긴이에 의하면, 무엇보다 이규경이 지녔던 명백한 한계는 그가 볼 수 있었던 서양의 서적이, 한역된 洋書인 탕약망(Adam Schall)의 『주제군징』으로 한정된다는 사실이었다. 갈레노스로 대표되는 서양 중세의 의학론을 담고 있는 『주제군징』은 이미 시간이 무척이나 지난 과거의 지식만을 제공했다. 반면,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의학·천문·군사 등의 기술학 관련서적을 원전으로 보고 있었으며, 네덜란드 상관에서 일하는 역관이 서양학문의 전수를 주도했다. 『해체신서』야말로 서양의학서를 원전으로 접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한 주요 사례였다. 최신의 서양학문을 자국어로 번역해 수용하는 것은 당시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시도였다.

『해체신서』를 국내 처음으로 완역하고 해제를 쓴 김성수 교수는 “이규경이 『해체신서』를 봤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내용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양 원전을 탐독하고 당대의 서양학문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했더라면, 한국 근현대사는 어쩌면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역사 가정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가정’보다 중요한 것은, 『해체신서』의 수용과 번역,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근대의학용어의 흔적을 ‘사실’ 그대로 읽어내고, 이를 지식의 반성적 재구성 작업을 통해 재구축하는 일일 것이다. 1774년에 나온 책이 2014년에 우리말로 번역됐다는 것은 여전히 시사적이다.